순남씨 부엌에서 내가 컸다
할머니 친구분들 그리고 일가친척 사이에서 어릴적 나는 ‘빵순이’로 통했다. 서너살쯤 되었을까. 심통이 난 듯한 표정으로 찍힌 사진이 한 장 속 나는 영락없이 동글납작 빵순이다. 얼굴뿐 아니라 손가락까지도 살이 포동포동 올라 있다.
나는 별명만큼 동글하게 자리지는 않았다. 외모도 성격도 무던하지 않다. 요즘 빵순이는 빵을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 듯한데 나는 그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입짧은 사람의 호기심에 냉동고 한칸은 밥빵 전용칸이 되어 버렸지만. 통밀이나 발효종이니 하는 이름이 붙은 빵들과 잉글리시 머핀, 블루베리 베이글, 치아바타, 얼그레이 스콘 등 하루에 딱 한 조각 먹는 주제에 욕심부린 결과다.
할머니가 내게 빵순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진짜 이유는 동그란 외모나 빵을 좋아하는 식성 때문이 이나었다. 아기 시절 내가 누인대로 잠을 자는 바람에 뒤통수가 납작하게 눌려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빵순이라고 부르기로 하셨다고 했다. 실제도 내 뒤통수는 동그랗지 않다. 왼쪽 뒤통수가 평편하게 찌그러진 듯하다. 할머니가 내 두상의 형태까지 관리하셔야 할 의무는 없다. 그래도 오만 때만 불만이던 사춘기를 지내면서는 머리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게 나오는 뒤통수 때문에 신경이 쓰이곤 했다.
내 별명 탄생의 비화를 모르는 어른들은 나를 빵을 좋아하는 아이로 오해하셨다. 그 덕에 나는 가끔 마실 오신 어른들에게 빵 사먹으라고 용돈을 받기도 했다. 우리 동네에는 ‘맛나당’이라는 빵집이 있었다. 면 소재지에 유일한 빵집이었다. 내 인생에서 첫 빵맛은 모두 맛나당 사장님의 손맛이었다. 찹쌀도너츠, 생도너츠, 고로케, 단팥빵, 소보로. 맛나당에는 겨울 특별 메뉴도 있었다. 성탄절 이브 공연 연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 길에 주차장집 못 미쳐 있었던 맛나당에서는 허연 김이 모락모락 올랐었다. 만두와 찐빵을 찌는 증기였다. 아주 가끔 할아버지가 입이 궁금하시다고 하면 내가 심부름으로 만두를 사러 갔었다.
내 용돈으로는 맛나당의 고로케를 사먹을 만큼 넉넉했을리 만무다. 그래서 그랬는지 나의 초등학교 때 빵은 보름달빵으로 기억되어 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먹지 않았던 것 같다. 찾아보니 1976년 9월에 처음 나왔다는 보름달빵이 1백원이였단다. 충격이다. 최고급 아이스크림이었던 부라보콘이 50원~75원정도였다. 라면땅이 10원~20원 이었다. 1백원인 보름달빵도 자주 못 먹었겠다 싶다.
기억 속 보름달빵은 내 손바닥 두 개를 다 덮을만큼 컸다. 동그랗고 얇은 카스테라 빵이 두장 겹쳐 있었다. 빵 사이에는 달콤한 흰색 크림이 발라져 있었고. 한입에 꿀꺽 베어 먹을 수 있을 만큼 얇았지만 나는 절대로 한입에 넣지 않았다. 윗장을 먼저 엄지와 검지로 조금씩 떼어 먹은 후 가운데 크림을 혀끝으로 충분히 오랫동안 천천히 핥아먹었다. 남은 아랫장은 빵 사이로 베어든 크림 덕에 조금 더 촉촉해졌다. 이번엔 과감하게 반으로 접어 반달모양을 만든다. 두장의 두께감을 느끼며 조금씩 베어서 먹었다.
2023년에 리뉴얼되었다는 보름달빵을 한 개만 사고 싶었는데 그 또한 여의치 않아 일부러 대혀마트까지 가서 구해 왔다. 아무래도 빵의 지름이 줄어든 것 같다. 대신 두께가 도톰해서 미니케이크의 모양을 하고 있다. 봉지를 뜯자 기억 속 보름달빵 냄새가 난다. 버터와 설탕이 섞인 달큰한 향. 앞으로 다시 보름달빵을 먹을 일이 없을 것 같아 이번에는 칼과 포크로 조각케이크 모양을 만들어 한 입 넣었다. 맛도 비슷하다. 좋다. 칼로리가 걱정된다. 그래도 이렇게 아주 오래전 맛을 지금 먹을 수 있다니 참 좋구나.
뒷장에 "사진관 앞 4살"이라는 글씨가 적혀있다. 할머니가 쓰신 것일까. 할아버지가 쓰신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