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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 혜진 Oct 27. 2020

혐오는 혐오로 돌아온다.

내가 강아지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아주 곤란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아직 훈련이 잘되지 않아 천방지축인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 일입니다. 강아지에게 산책은 사회성 발달에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리고 충분히 뛰어놀며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하면 갖가지 말썽을 부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 한두 번은 반드시 산책을 합니다. 그런데 아직 부끄러운 게 뭔지 모르는 내 강아지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길가에서 대소변을 보면 나는 난감해집니다.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대변을 봉투에 주워 담습니다. 집에까지 가지고 와서 변기에 버리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강아지가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강아지 똥이 더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하는 행동이지만 사실 내가 강아지를 키우기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입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않게 하려고 후다닥 해치웁니다.      


오랜만에 습한 기운이 사라지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는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내 강아지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보란 듯이 엉덩이를 내리고 시원하게 볼일을 봤습니다. 나는 평소처럼 부랴부랴 강아지똥을 배변 봉투에 주워 담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산책길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앉아 무엇인가를 팔고 있던 할아버지가 진저리를 치는 목소리로 ”아이 더러워 “ 하고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나는 부랴부랴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멀어지는 동안 그 할아버지는 마치 나에게 들으라는 듯 점점 목소리를 올리며 ”아이 더러워 “를 외쳤습니다. 나중에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듯하더니 ”개가 이쁘면 저나 이쁘지 개를 사람 취급하고 지랄들이야. 개는 개지! “ 하면서 오랫동안 구시렁거렸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나와 그 할아버지, 그리고 내 강아지에게로 쏠리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 산책길에는 항상 한 두 마리의 강아지가 주인을 따라 산책하는 곳입니다. 강아지를 귀엽다며 기분 좋은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지만 불쾌하게 노려보며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강아지 주인들이 모이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이유 없이 욕을 먹었다거나 심지어 발길질이나 돌팔매질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올라옵니다. 그래서 되도록 사람이 적은 시간에 눈치 보며 산책을 한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도 비슷한 일을 당하고 나니 당황스럽고 억울하고 분했습니다.      


애견인구가 많아지고 텔레비전 방송사마다 애완동물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지만 애완동물을 혐오 하다못해 그 주인까지 싸잡아 동물 취급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나도 그 정도는 감수하고 강아지를 키우고 있으니 나이 많은 할아버지의 과민한 반응도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물림 사고도 많아졌고 유기견 관련 뉴스도 자주 등장합니다. 공동주택에서 개를 키우다 보니 이웃 간의 분쟁도 많습니다. 개를 키우는 내가 봐도 불쾌한 사건들이 대부분입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면 문득 신경이 쓰입니다. 분명 이웃에 사는 사람이 스트레스를 호소할 테고 몰상식한 사람이 아니라면 개 주인도 이웃의 눈치를 보느라 늘 긴장하고 살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산책길에 방치된 개똥이 눈에 띄면 내가 들고나간 배변 봉투로 치울 때도 있습니다. 개 키우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개를 키우기 전에는 관심 없던 일들입니다. 하지만 이제 개 키우는 사람 모두를 싸잡아 욕하는 게 듣기 싫어서 나도 자꾸 사람들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나도 개를 키우기 전까지는 내손으로 개똥을 치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인지라 할아버지 눈에 얼마나 혐오스러운 장면일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반응은 너무 과했습니다. 그렇다고 받아칠 용기도 나지 않았습니다. 주변 시선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유 있게 풀냄새를 맞는 강아지를 억지로 잡아끌어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되도록 그 길을 피했습니다. 가끔 그 길로 산책을 갈 때도 있었지만 멀리서 그 할아버지가 보이는지 확인하고서야 그쪽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늘 그럴 수만은 없는 노릇인지라 언젠가는 용기 내어 다시 할아버지 앞을 지나가 보리라 생각했습니다. 만약 또 나에게 불쾌한 행동을 하면 반드시 응수를 하겠다며 벼르기도 했습니다.  ”강아지 똥을 안 치운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난리 치세요. 이 길 할아버지 혼자 전세 냈어요? “ 뭐 이런 촌스러운 말도 속으로 연습했습니다. 처음 당했을 때 했어야 할 말인데 당황해서 입도 뻥끗 못한 것이 후회가 됐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명절을 하루 앞둔 날이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고향에 내려가지 않아 집에 머물다가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섰습니다. 명절 전날이니 그 할아버지도 집에서 쉬시려니 하고 그쪽 길로 산책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멀리서부터 그 할아버지가 누군가와 시끌벅쩍하게 시비가 붙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지켜보니 한 남자가 그 할아버지가 팔고 있는 푸성귀를 가리키며 어디서 채취한 것인지도 모르는 더러운 걸 갖다 판다며 식품 위생법 운운하며 으름장을 놓는 중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더럽기는 뭐가 더럽냐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항변했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허가받지 않은 노상 판매도 불법이라며 구청에 신고를 하겠다고 전화기를 꺼내 들었습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짐 보따리를 챙겨 도망치듯 자리를 떴습니다. 남자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에 대고  한 번만 더 눈의 띄면 구청에 바로 신고하겠다면서 이곳에서 장사할 생각하지 말라고 다시 한번 큰소리치고 할아버지와 반대 방향으로 떠났습니다. 그 남자 곁에 앙증맞게 생긴 강아지 한 마리가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나는 가끔 노상에서 할아버지가 펼쳐놓고 파는 물건을 살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큰돈이 될 것 같지도 않은 보따리를 애지중지 싸들고 자리를 뜨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 할아버지가 저 자리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안도감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간에 무슨 속사정이 있어서 남자가 작정을 하고 할아버지를 쫒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개를 싫어하실까요. 그렇게 적대감을 과하게 드러낼 만큼 큰 상처가 있는 것일까요. 혹시 옆집에 개가 시끄럽게 짖어서 밤잠을 설치시거나, 아니면 개에게 물린 기억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이도 저도 아니면 난전에서 행상이나 하고 있는 자신의 고된 삶이 한스러워 팔자 좋아 보이는 개와 주인을 보면 부아가 치미는 것일까요,     


그보다는 이해를 할 수 없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개는 개일뿐인데 사람처럼 대한다는 말을 할 때 할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습니다.


개는 한때 마당에서 집을 지키다가 여차하면 비상식량 취급을 받거나 몸보신을 위한 고기로 여겨질 때가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대부분 사냥이나 목축을 위해서 도구처럼 거칠게 사육됐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특별한 목적 없이 사람들의 장난감이나 인형처럼 길러지기도 하고 심지어 가족으로 극진한 대우를 받습니다. 호칭도 아들이나 딸로 불리고 개 주인은 엄마 아빠가 됩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부와 여유를 과시하는 상징처럼 비추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을 많은 사람들, 특히 노년층은 이해를 못합니다. 마당에서 추위와 더위를 견디며 자기 똥을 집어 먹기도 하던 더러운 개를 사람 아기 대하듯 하는 꼴이 보기 싫었을 겁니다. 거기에 각종 사건 사고 소식이 두려움을 키우고 누군가의 불쾌한 경험이 과장되게 번지면서 자신이 피해본 것도 없으면서 개가 싫어지기도 합니다. 할아버지도 그래서 개 주인의 꼴불견 행태가 눈엣가시였을 겁니다.


이게 다 상대를 이해하지 못해서 생기는 감정입니다.     


자신의 가치관으로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을 접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갖게 됩니다. 그 감정이 밖으로 표출될 때 혐오가 됩니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면 세대 간 갈등이 혐오로 표출됩니다. 남자에게 순종적이던 여자들이 이제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해졌습니다. 남자는 집에서 가족을 돌보며 희생했던 엄마들과 영 딴판인 젊은 여자들을 이해할 수 없어서 비난하고 혐오합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 세대보다 훨씬 복잡하고 경쟁적인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지만 정작 세상은 엄마가 살던 시대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 종교와 다른 종교에 대한 무지 때문에 자신이 믿는 신 이외에는 모두 혐오의 대상입니다.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 없던 성소수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종말을 맞이 하듯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혐오감을 드러냅니다.


장애인들을 보며 비하하고 천시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만   집안에만 갇혀있던 장애인들이 어느 날부터 인권을 내세우며 문밖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불쌍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해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정상인’도 살기 힘든 세상에서 장애인까지 설쳐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혐오 인 줄도 모릅니다.    


혐오의 대상은 주로 약자거나 소수자입니다. 그 자리에 서 본 적이 없어서 입장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기득권 세력이나 숫자 싸움에서 우세한 쪽이 혐오하는 자들입니다.


 항상 강한 쪽은 당당합니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그래서 부끄러운 줄도 모릅니다. 기존의 질서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기존 세력에 대항해서 세상을 바꾸려는 쪽의 목소리가 커지는 게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혐오 표현을 무기처럼 사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들짐승들 같습니다.


혐오의 대상들은 반항을 해보지만 너무 긴 싸움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늘 시끄럽습니다. 하지만 기존 세력의 혐오 표출이 요란할수록 변화를 시도하는 쪽의 힘이 강해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개를 싫어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를 키우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개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더 강하게 혐오를 표출할 겁니다. 개가 많이 보이지 않을 때는 굳이 자신의 혐오를 드러내지 않던 사람들까지 가세해서 목소리를 보탤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개 키우는 사람은 당분간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일종의 시대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른 뒤 서양의 많은 나라들처럼 개 키우는 사람이 월등히 많아지면 개 혐오는 잦아들 겁니다. 대세가 역전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늘 그렇게 조금씩 변해왔습니다.     


 개를 키우는 사람 중에는 개 훈련을 제대로 시키지 않아 이웃에게 불편을 주고 산책한답시고 개를 끌고 나와 개똥도 치우지 않는 몰상식한 사람도 같이 늘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때는  따끔하게 지적을 해야 합니다. 아무 잘못 없는 개를 길거리에 내다 버리는 사람에게는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개를 키우는 사람을 다 똑같이 혐오를 해도 괜찮은 것을 아닙니다.  


세상에 개가 엄청나게 많아져서 길거리 곳곳이 개똥 천지가 되고 골목골목 어디에서든 개가 갑자기 나타나서 짖어 대거나 물까 봐 참을 수 없는 두려운 마음이 든다면 공포증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무슨 핑계를 대도 혐오는 그냥 혐오일 뿐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혐오를 당하는 쪽도 힘들지만 혐오를 하는 쪽도 만만치 않게 피곤하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핏대를 세워가며 혐오를 표현하는 사람들도 편치 않을게 분명합니다.



사실은 나도 한때는 혐오하는 사람들을 혐오하느라 내 힘을 소모한 적이 있습니다. 인터넷 뉴스의 이해할 수 없는 댓글을 보면서 울화가 치밀어 혐오로 응대했습니다. 길거리에서 무뢰한 사람을 만나면 혐오로 응징했습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를 가진 사람을 내뜻대로 바꿔보려고 잘잘못을 따졌습니다.


내 딸들에게도 한동안 혐오를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은커녕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나의 혐오를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약자의 편에 서야 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지만 사실은 혐오를 가르친 것 같습니다. 그때는 혐오하는 자의 삶이 얼마나 불행한지 몰랐습니다. 나의 혐오가 정당 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혐오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혐오하는 삶이 나를 얼마나 곤하게 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혐오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중입니다.


 혐오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을 환영하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얼굴을 가리고 이름을 숨긴 온라인상에서나 목소리를 높이며 몰려다닙니다.  떳떳하지 은 모습니다.  딸들이 나처럼 온신경을 곤두세우고 혐오를 혐오로 응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행히 내 딸들도 백인들이 주류인 사회에서 동양인 여자로 살면서 혐오가 어떤 형태로 사람들을 갈라놓는지 보고 배운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엄마의 영향보다는 학교와 지역공동체에서 가르치는 대로 혐오하지 않고 함께 살려고 노력하는 듯합니다. 천만다행입니다. 편협하게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과 서로 연대하면서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듯합니다.  



 전장을 하지 않고 평화롭게 함께 살려면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고 왜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래도 이해할 수 없다면 잠시라도 눈을 감고 상대와 단절을 택하면 됩니다.


혹시라도 무엇인가 변화시키고 싶거나 부당한 변화를 막고 싶다면 합리적인 방법으로 내 편을 들어줄 사람들과 힘을 합치면 됩니다. 상대가 싸움을 걸어온다면 어쩔 수 없이 응대해야겠지만 그마저도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낫습니다. 분풀이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소리쳐봐야 설득될 상대가 아닙니다. 어차피 싸워서 남는 것은 혐오뿐입니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내 논리를 점검하고 힘을 길러야 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자녀에게 혐오를 가르치는 말아야 합니다. 부모가 먼저 소수자와 약자,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아이들에게도 세상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편안해집니다. 혐오를 방조하고 가르친다면 언젠가 내 아이가 혐오의 대상에 된다고 하더라고 할 말이 없을 겁니다.       


요즘 우리는 평균 수명이 80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 내 가치관을 흔들지 모릅니다. 그때마다 옛것을 지키겠다고 으르렁대느니 차라리 어떻게 하면 같이 잘 살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게 낫습니다. 항상 마음을 열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는 가끔 산책길에서 할아버지가 파는 산밤이나 호박잎을 사고 싶습니다. 비록 불법이라고 하더라도, 출처를 알 수 없어서 위생 상태를 확인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지나가는 개들에게 더럽다고 소리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굳이 예뻐하거나 좋아하는 시늉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산책할 때 시비만 걸지 않으면 됩니다. 나도  내 강아지가 길가에 싸는 똥을 잘 치우고 이웃에 피해 주지 않도록 열심히 훈련시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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