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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지 Oct 06. 2023

죽일 순 없잖아요

제갈량의 비책이 필요할 때


바보, 멍청이, 똥개, 해삼, 말미잘을 제외하고 처음 한 비속어는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죽는다'였던 것 같다. 어린 시절 그런 섬찟한 말을 서슴없이 했다. 시도 때도 없이 포니테일을 잡아당기고 모른 척하는 뒷자리 남자애에게, 내 튀어나온 앞니를 보며 토깽이라고 놀리는 짝꿍에게. 하지만 그 시절 사진을 보다 보면 그 말이 얼마나 유효했을까 싶다. 또래의 절반도 안 되는 신장으로 앞으로나란히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기준'만 되었던 아이.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조그만 주먹을 움켜쥐곤 쉬익 쉬익 거리며 그런 이야길 잘도 했다. 죽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성인이 되고 그 말의 향방은 타인에게서 자신에게로 바뀌었다. '죽겠네'라는 말이 말 끝마다 붙었다. 과제가 잘 풀리지 않을 때 맥주 한 캔을 까며 곧잘 그 말을 내뱉었다. 상사가 회의실로 따로 부를 만큼 큰 실수를 했을 땐 '죽고 싶다'라고 했다. 큰 행사를 앞두고 야근을 할 땐 '죽을 것 같아'라고 했다. 퇴근길 택시 안에서 나를 죽이는 게 남을 죽이는 것보다 가성비가 좋지 않나 생각하다 그게 너무 슬퍼 울기도 했다. 죽어본 적도 없으면서. 죽도록 해본 적도 사실 없으면서 그랬다.


그런데 꼭 그렇게 죽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야 살 수 있는 건가. 혹은 죽기 전에 단 한 번도 최선을 다했다 자부할 만한 삶을 살지 않아도 괜찮은 건가. 그건 늘 괴로웠다. 하루 종일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시간을 축내면서도 내 전화를 엿듣고는"전화 응대 시, 상대방을 위한 추임새도 신경 써야 한다. '그러셨구나'는 반말이니 '그러셨군요'라고 할 것"이라 지적하는 저기 저 부장님을 보며 고민은 심화해 갔다. 그는 최선을 다하지 않고도 죽지 않고 살아있으나 그렇게 사는 삶이 죽는 것보다 낫다 할 수 없지 않은가. 햄릿이 고민한 죽느냐, 사느냐는 이런 고민이 아니었을까. 죽고 사는 것은 그저 동전 뒤집기로 양단간에 고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한 직선의 양 끝을 붙여 꼬아놓은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것이니까.


만두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동양의 솔로몬, 제갈량의 이야기에 도달한다. 남만 정벌 후 복귀하는 제갈량이 심한 풍랑을 만났을 때, 희생된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49명의 머리를 잘라 강에 바쳐야 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위해 또 다른 살인을 할 수 없었던 제갈량은 밀가루를 빚고 그 안에 고기와 야채를 섞어 넣은 것으로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달랬다는 것이 '만두'의 시초라는 것이다. 실제로 만두의 '두'는 여전히 '머리 두(頭)'자를 쓰고 있다. 죽음을 대신한 머리. 희생을 대신한 희생. 하나를 입에 물고 콱 씹으면 터져 나오는 복잡스러운 혼합물은 '생(生)과 사(死)'라는 순리 가운데 복잡다단한 인생의 에피소드 군상 같다. 신이 눈 감아준 인간의 지혜라니. 이런 기원을 알고 나니 만두를 보는 시선 또한 어쩐지 겸허해진다.


그래, 죽일 순 없잖아. 저기 저 부장님을 흘기며 마음을 다잡는다. 인간의 생사는 어찌할 수 없지만 만두 정도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지. 마음이 버석할 때는 군만두를, 우울할 때는 찐만두를, 쪼그라들었을 때는 물만두를 먹는다. 참을 인(忍) 세 번 대신 만두 세 개. 오늘의 리빙 포인트.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잔인한 아픔 따위를 견디려 애쓰지 말자. 나도 살고 너도 살리는 만두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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