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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지호 Jul 18. 2023

서신 10. 상황이 곤궁하니 축의금을 깎아 주세요

마침내 결혼하는 10에게

10에게.

 

'뜨칸차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편지 서두부터 엉뚱한 질문으로 심려를 끼쳐드려 아주 조금 죄송합니다. 아주 조금은 개미 눈물 만큼입니다. '뜨거운 추상은 칸딘스키, 차가운 추상은 몬드리안'의 줄임말입니다.

 

미술 수업이었습니다. 아마 10도  함께 들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만들거나 그려야만 했던 평소와는 달리 선생님은 기말고사를 위해 이론 수업을 했습니다. 예술을 논하기에는 너무 어린 중학생 아이들을 앞에 두고 선생님은 얼마나 많은 허탈함을 품었을까요. 그래서인지 암기해야 할 것들을 줄 쳐주고 친절하게 암기법을 만들어 우리에게 받아 적게 시켰습니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아직도 '뜨칸차몬'이라는 암기법을 기억합니다. 백 점을 받아서만은 아닙니다. 칸딘스키의 그림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릅니다. 몬드리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 추상화에 대해 말을 하면 '칸딘스키는 뜨겁고 몬드리안은 차갑지' 하고 말을 보탤 수 있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교양일까요? 그렇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칼카나마알아철니'나 '수헤리베붕탄질산'도 교양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인생에 하등 중요하지 않은 것도, 왜인지 기억에 남아버리고 마는 것이 있습니다. 10은 내게 그런 사람입니다. 막상 그렇게 쓰고 나니 어쩐지 마음 아픈 글입니다. 중요하지 않다, 에 초점을 맞추지 마시고 기억에 남아버리고 만다, 에 관심을 표해 주십시오. 그러면 조금은 용서할 마음도 나겠지요.

 

나는 10에게 주기적으로 연락을 드렸습니다. 아마도 조금 갸우뚱하실 텐데요. 분명히 주기는 비정기적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수열에는 아주 복잡한 공식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10은 맞추지 못하실 겁니다. 사실 나도 명확히 정의하지 못하거든요. 10이 아주 뜬금없이 기억날 때마다 연락을 드렸습니다. 시간이 많다면 함수를 한 번 풀어 보십시오.

 

구태여 관계를 해체하고 들여다보면 10과 나는 절친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절친한 것이 무엇이냐 따져 물은다면 참 대답하기가 곤란합니다. 다그친다면 내 기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뜬금없이 약속을 잡아 만나 구태여 조용히 있어도 불편하지 않은 사람이겠습니다.

 

그래도 10과 저는 계속 만남을 이어 갔지요. 나는 그것이 어떠한 운명의 지속으로 느껴졌습니다. 살다 보면 가끔 그런 것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뇌리에 박혀버린 '뜨칸차몬' 같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계획하며 살아가면서도 그런 운명적인 것을 마주하면 한없이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굳이 이런 말을 서신으로 적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갑자기 그러고 싶었습니다. 왜 그러고 싶었냐고 부디 묻지 말아 주십시오. 나는 이제 내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이 어려워져버리고 만 사람입니다. 그러니 빈 공간에 당당히 선언하겠습니다. 나는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는 머저리입니다.

 

머저리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일화가 있습니다. '병신과 머저리'라는 소설을 아시나요? 욕이 제목이라는 것만으로 중학생들에게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했던 책입니다. 아마 우리 학년 짱도 그 제목을 보고 픽 웃었던 것만 같습니다.

 

여하튼 국어 시간에 그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10도 함께였을 것입니다. 나는 점심시간에 땡볕에서 공을 차고 난 후라 영 졸리기만 했었고 고개를 떨군 내게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이 책에서 병신과 머저리가 뭘까?"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은 '둘 다 너다 이 자식아'라는 말과 함께 단소로 제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소리도 나지 않았고 아프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가끔 공부를 잘했던 것은 이런 작은 보답으로 돌아옵니다. 아마 내가 국어 시험에서 백 점을 받지 못했더라면 머리에 혹이 생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득 생각해 보면요. 그때의 선생님들은 지금의 우리보다 어렸습니다. 그렇게 보면 어른들은 참 불쌍한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너무 쉽게 어른들의 어려움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합니다. 아니면 어른이 어려운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버리고 맙니다. 그런 기준에서 나는 어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가끔 그런 면에서 10이 부럽습니다. 어려워 보이는 것을 쉽게 해결하고 말아 버렸으니까요. 나는 아직도 어떻게 타인을 사랑하고 믿고 영원을 약속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타인을 그리워하고 기억하고 슬퍼하는 일입니다. 분명히 중학생 때는 똑똑했는데요. 그렇게 낡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요. 결혼 축하합니다. 부디 한 번이라도 미소를 지으셨다면 축의금을 조금 깎아 주십시오. 상황이 다소 곤궁합니다. 아주 조금은 진심입니다. 아주 조금은 개미 눈물 만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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