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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지호 Jul 13. 2023

서신 09. 어느덧 당신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깊이 숨어버린 09에게

09에게.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사는 것이 바빴습니다. 글 몇 자 내릴 시간도 없었냐고 굳이 캐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확실히 바쁘기는 했습니다. 편지를 쓸 정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쓸 자신이 없었습니다.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차마 부끄러워 말할 수 없습니다. 너무 짓궂지 않게 상상하세요.

 

새벽녘에 일어나 앉아 09에게 드릴 편지를 씁니다. 모나고 뾰족한 단어들을 체에 몇 번을 걸렀습니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09에게 닿는 것들은 그리 어둡지 않은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안 그래도 퍽 어두운 사람이 어두운 글들을 붙잡고 있으면 모습이 보기 좋지 않을 겁니다. 그런 것은 나 하나로 족합니다.

 

나는 어느덧 그때의 09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벌써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몇 년 지나지 않았지만 감정이 꼭 그때 같지만은 않습니다. 모든 감정의 기저부에 어느 정도의 피곤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웃는 것도 피곤하고 우는 것도 피곤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겠지요.



 

09가 자주 입던 청바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직 옷장에 걸려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색이 퍽 바래 있었으니까요. 요즘 나는 그 색 바랜 청바지 같은 기분입니다. 원체 가지고 있던 총천연색 감정은 물이 빠져버렸습니다.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파스텔톤이라고 하면 좋을까요.

 

09는 나의 원색을 사랑해 주었지요. 나는 그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선물로 일기 몇 장을 찢어서 달라고 했던 발칙한 요구가 기억이 납니다. 좋아했는지 아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저 나는 홍조가 들키지 않기를 바라고만 있었습니다.

 

이제는 같은 원색으로 나를 대하지 못했던 09가 이해가 갑니다.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고 늘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가 봅니다. 09는 이제 더 나이가 들었으니 또 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때도 그랬지만 09는 자신을 설명하는 것에 참 어려움을 겪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마 열심히 설명하려고 노력해도 나는 이해하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 예기치 못한 사람에게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들었습니다. 그때의 우리는 상상하지 못했을 일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두더지보다 더 깊은 곳에 숨어버린 당신에게 전화를 할지 말지 고민했습니다. 마음을 굳게 먹고 번호 목록을 찾았는데 번호가 없더라고요. 내 기억에는 지운 일이 없으니 아마 술을 진탕 먹고 09가 미워 지웠던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몇 자 내립니다. 글을 내린다는 표현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그렇지만 여전합니다. 그것 아십니까. 글을 내린다는 표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내 편지 서두의 어떤 아이덴티티가 되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스러져 없어져도 그 글귀를 떠올릴 때마다 09를 기억할 겁니다.



 

주소를 찾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에 남겨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집 앞에서 비틀거린 것이 몇 번인데 내가 감히 그 장소를 잊겠습니까. 다만 나는 09가 이 편지를 읽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아직도 그곳에서 살고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나는 아직도 잘 울지 못합니다. 우는 것이 어렵습니다. 최근에 적당하지 못하게 힘든 일이 있어서 울려고 한참을 시도했는데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슬픈 노래와 슬픈 영화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친구가 추천해 준 죽은 반려견에 대한 영상도 차도는 없었습니다. 북한에 적을 둔 것도 아닌데 이산가족 영상을 보고서야 겨우 눈물 몇 방울 흘릴 수 있었습니다.

 

09와의 마지막을 내 울음으로 기억합니다. 정말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편하게 펑펑 울었습니다. 속 안에 어떤 서글픔을 꺼내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몇몇 사건이 있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끝은 늘 그 울음이었습니다. 지금쯤이면 나도 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합니다.

 

우연이 겹쳐 마침내 닿은 운명을 좋아합니다. 그러니 그곳에 아직 살고 있거든, 이 편지를 보게 되거든 연락을 주십시오. 전화도 상관없겠습니다만 늘 그렇듯이 나는 손으로 쓴 활자를 좋아합니다. 09는 그것을 애늙은이 같다고 놀리면서도 꽤 좋아해 주었지요. 나는 여전히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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