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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지호 Jul 14. 2023

서신 08. 동음이의어는 피곤하지만 재밌습니다

홀로 반대할 용기를 가진 08에게

08에게.

 

08이 있는 곳에도 비가 오고 있나요? 나는 비가 오기에 대청소를 했습니다. 짐이 많지 않아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어요. 다만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나는 날씨기에 청소를 끝낸 후에 샤워를 해야만 했습니다. 모든 것이 깨끗해졌습니다. 늘 내 대청소의 마무리는 하나의 상자를 마주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랬습니다.

 

어렸을 때는 <보물 상자>라고 불렀는데요. 지금은 딱히 지어 준 이름은 없습니다. 버리기에는 너무 소중하지만 늘 끌어안고 보기에는 조금 그런 것들을 모아 뒀습니다. 초등학교 받아쓰기를 처음 백 점 받았을 때 담임 선생님께서 주신 토끼 가위부터 누군가 유럽 여행 선물로 줬던 작은 술병까지. 흘긋 보면 종량제 봉투에 탈탈 털어 넣고 버릴 것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편지도 그렇습니다. 상자 맨 밑에는 편지들을 모아 뒀습니다. 제일 오래된 편지는 초등학교 때 편지인데요. 아마 친구들이 내 실내화를 숨겨두고 끝내 주지 않아 서럽게 울었던 날인 것 같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담임선생님은 화가 잔뜩 나서 친구들을 혼냈고 우리 반 모두는 내게 편지를 써야 했습니다. 어떤 것들은 미안함이 깃들어있고 어떤 것들은 귀찮음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제는 아무도 기억 못 할 편지들입니다.



 

08의 것도 있습니다. 언젠가 그 위에 커피를 흘려서 조금 지저분해졌음을 부끄럽게 고백해야겠습니다. 원본의 상태로 보관하지 못해 조금 미안합니다. 그래도 오히려 빈티지해 보인다고 혼자 생각을 합니다.

 

그 편지를 볼 때면 내가 08을 좋아하게 된 계기를 기억하게 됩니다.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08을 이성적으로 좋아합니다만 이성적으로는 전혀 사랑하지 않습니다. 어떤 나이가 지나버리고 나면 이성과의 친교는 부정한 것에 가까워져버리고 맙니다. 나는 그런 세상에 꽤 불만이 많지만 늘 그렇듯 잘 순응하는 편입니다.

 

어떤 이성일까요? <다를 이> 아니면 <다스릴 이> 중 하나입니다. 나는 가끔 동음이의어가 있는 한국말이 퍼즐처럼 느껴져 혼자 웃으며 재밌어하는 때가 있습니다. 두 개 중 어떤 뜻인지 알기 위해서는 문맥을 읽어야 하는데 과연 08은 읽어낼 수 있을까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답을 기다리겠습니다.




모두가 찬성하는 것에 홀로 반대하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주 멋진 반골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야 하지요. 인생을 살며 그런 기질을 타고나는 사람은 좀처럼 찾기 어려웠어요. 그날 08은 최고의 반역자였습니다. 물론 그 후에 수 없이 많은 상처를 받게 되었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08은 하나를 얻지 않았습니까. 나 같은 충실한 개는 어디서 찾기도 힘듭니다.

 

08은 내 앞에 서면 혼나는 기분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왜인지 이유를 묻자 뭔가 찔리는 기분이라고 답했습니다. 나는 바른 인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08은 나보다 바르지 못한 인간일까요. 그래서 가끔 신부가 아님에도 08의 고해성사를 받아줘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의 편지이니 부디 읽고 울상 짓지 말아 주세요. 울음을 보고 듣는 것은 영 유쾌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위로하는 것에 재능이 없는 사람은 더 그렇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웃었으면 하고 글을 내리는데 사람들은 늘 여지없이 내 글에서 슬픔을 읽습니다. 08도 그랬지요.

 

설마 이 편지로도 눈물을 흘린다면 나는 다시는 08을 위해 우표를 사지 않을 겁니다. 슬퍼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세요. 그리고 그 맹세를 내게 장황하게 보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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