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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지호 Jul 19. 2023

서신 06. 생애 마지막 헌혈을 했습니다

언제나 쓰게 잔소리하던 06에게

06에게.

 

오랜만입니다. 헌혈을 했습니다. 헌혈이 오랜만이라는 뜻은 아니구요, 06에게 안부를 전하는 편지가 오랜만이라는 뜻입니다. 헌혈은 꽤 꾸준히 해 오고 있습니다. 요즘은 시간이 부족하지 않아서 혈소판을 뽑습니다. 두 시간정도 걸리더라구요. 하지만 오늘은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 전혈로 신청했습니다. 오늘이 내 마지막 헌혈이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유서가 아닙니다. 만약에 내가 유서를 꼭 써야만 한다면 수신인은 없을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남겨주고 떠날만한 사람은 아직 없어요. 아마 평생 없을 것 같습니다. 약을 먹어야 해서 헌혈을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내가 한국을 떠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06은 아주 놀랄까요 아니면 역시 그렇구나 하고 수긍을 할까요. 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해외에 다녀온 사람은 한 달 동안 헌혈을 하지 못한다고 해요. 헌혈의 집에서 그렇게 말했으니까 아마 정확할 겁니다. 한 달이나 되는 긴 시간을 한국에 다시 돌아올 확률도 희박하거니와 그 시간에 맞춰 굳이 헌혈을 하는 것은 어떠한 광기이자 집착이겠지요. 사실 두 가지 모두 나를 잘 지칭하는 단어인 것 같습니다.

 

갑자기 궁금해져서 미국 헌혈을 찾아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외국인은 헌혈이 쉽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특히 한국은 그렇습니다. 말라리아 때문인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말라리아 위험 국가라네요.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런 병은 저 멀리 떨어진 아프리카에서나 횡행하는 줄만 알았습니다.

 

여튼 그래서 오늘이 나의 마지막 헌혈이었습니다. 헌혈을 하면 기념품을 받게 되잖아요. 나는 오늘 처음으로 기부권을 골랐습니다.



 

아주 힘찬 박수를 쳐 주세요. 너무도 멀어 소리를 듣지 못하겠지만 06이 손뼉 치는 모습을 상상하겠습니다. 제가 그럴싸한 인간으로 진보한 것이 꽤 대견하지 않습니까. 나는 드디어 문화상품권이나 영화관람권을 위해 헌혈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 그전까지는 조금 매혈하는 기분이 없지 않아 있었어요.

 

헌혈 기념품을 받을 때면 06의 생각이 납니다. 아마 06도 그럴 것만 같습니다. 아니라면 부끄럽네요. 내가 06에게 영화 티켓을 내밀었던 순간을 기억하나요? 그것은 내 삶의 거대한 한 걸음이었습니다.

 

몇 번 말했다시피 나는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과 영화관에 가는 것은 매우 싫은 일에 속합니다. 하지만 나는 06에게 갚아야만 할 빚이 있었지요. 유일하게 잘하는 것은 흘러가는 말을 몽땅 머릿속에 넣고 기억하는 일뿐이라 나는 헌혈을 해 영화 관람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06이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나는 눈물이라는 것이 그렇게 폭포수처럼 흐를 수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왜 06이 우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어요. 다만 그 광경을 보며 사람들이 폭포 구경을 가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개봉 예정인 독립영화를 보고 싶다는 말에 영화 표를 구해 온 것뿐인데 06은 아주 서러운 폭포가 되었습니다.



 

참 설명하기 어려웠어요. 그러니까 내 기준에서는 영화관에 돈을 쓰는 것은 아주 무가치한 일이니 헌혈을 몇 번 해서 티켓을 얻었을 뿐입니다. 그날 이후로 06은 몇 번인가 나를 위로하는 표정을 지으며 밥을 사 주었습니다.

 

사실 나는 그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는데요. 그냥 그 일련의 과정들을 설명할 수 있는 재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06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결국 나는 마음의 빚을 데굴데굴 굴려 산더미처럼 쌓아 버리고 말았지요.

 

그때부터 가끔 헌혈을 하게 되었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기대받고 나니 멈춰버릴 수가 없다고 해야 할까요.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 보통 영화관람권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몇 번의 영화에 가지 않고 자리를 예약한 적이 있어요.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랬습니다. 가장 안 좋은 자리를 예약해 두고 영화관에 가는 상상만 했습니다. 영화 말고 책을 함께 보는 곳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요. 아마도 그 넓은 공간엔 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 아시나요. 헌혈을 위한 침대에 누워 피를 뽑고 있으면 뭔가 성스러운 기분이 듭니다. 어떠한 종교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습니다. 간호사 선생님들이 친절해서일지도 몰라요. 가만히 잠깐 누워 있다가 기념품을 받는 것뿐인데도 아주 대단한 것을 한 것처럼 귀하게 대해주십니다. 가끔 그런 기분에 취해 헌혈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마치 06처럼 말입니다. 06은 늘 나를 아주 귀하게 대해주셨지요. 나는 그런 특별 대접이 퍽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칭찬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어요.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늘 ‘알아서 잘하는 애’ 였습니다. 그 평가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는 편이고 또 때로는 자부심도 있는 편이지만, 사실 그 수식어는 꽤 외롭습니다.



 

나는 늘 말썽을 피워 도움을 받는 사람들을 부러워만 했습니다. 06 옆에 있으면 나도 따뜻한 관심을 받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내가 필요한 것은 그런 질책 어린 관심이었어요. 확실히 06은 잔소리계의 아티스트입니다. 나는 사람을 몇몇 문장으로 기억합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06을 기억하는 문장들은 전부 잔소리예요. 그래서 더욱 고맙습니다.

 

그런 것들에 기대어 나는 결국 무일푼으로 얼굴 모르는 사람을 돕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헌혈 기부권 한 장으로 너무 공치사하는 것만 같은데요. 잠깐이나마 돈이나 효율성을 생각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는 오늘 잠깐이나마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아 좋았습니다. 06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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