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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지호 Aug 02. 2023

서신 04. 오랜만에 편지를 내립니다

낭만을 이야기하는 04에게

04에게.

 

오랜만에 편지를 내립니다. 편지를 쓰다라고 하거나 편지를 적다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쓰다'는 말 그대로 써서 맛보고 싶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적다'는 말 그대로 적어서 부족한 기분이에요. 그래서 다른 단어를 찾느라 며칠을 고민한 적이 많습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단어는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내 마음대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를 편지 뒤에 붙였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내린다고 합니다. 내게 편지께나 받아본 사람들은 다 이 말을 기억하고는 합니다. 04도 기억해 주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내리는 그 모든 것들은 슬프게 따뜻해요. 비도 그렇고, 차도 그렇고, 낙엽도 그렇습니다. 나는 어쩌면 하강하는 그 무언가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무덤덤하게 추락하는 것이 그리도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탈 때도 이륙은 싫어하지만 착륙은 그렇게나 좋아합니다. 도착지가 기대되어서는 아니에요. 그냥 그 내려가는 기분이 너무나도 행복합니다. 나는 착륙 시간이 두 배는 더 되었으면 좋겠어요. 각도를 낮추면 조금 더 멀리서부터 내려갈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04에게 보낼 종이 한 장에 글자들을 줄지어 내립니다. 내 글에 담고 싶은 것은 슬프고 따뜻한 것입니다. 어울리지 않은 단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 세상에는 행복한 것이 너무나도 많아요. 괜히 심통이 납니다. 당장 핸드폰을 들어 보십시오. '유튜브'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인스타그램'에는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아무도 슬픔에 대해서는 광고하지 않아요. 나는 가끔 모든 사람들이 행복이라는 이름의 탈을 쓰고 광대놀음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슬픔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너무 뜨겁거나 차가운 것은 조금 그래요. 04는 목욕탕을 가는 것을 좋아하시나요? 나는 가끔 혼자 가고는 합니다. 초등학생 때는 열탕 속에서 시간을 재고 버티다가 냉탕에 풍덩 빠져 수영을 하곤 했는데요. 이제는 그런 것보다는 미지근한 곳에 몸을 담그고 조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딱 몸을 노곤하게 하는 온도. 그 온도의 슬픔이 가장 좋아요.  



 

04는 딱 그런 온도의 사람입니다. 나는 04가 열과 성을 다해 무언가를 주장하거나, 아주 매정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힐난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어요. 꽤 친해진다면 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별로 보고 싶지는 않으니 부디 나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다시 04에게 어떤 벽을 쳐 버리고 만 것 같네요. 하지만 04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처음 본 사람의 눈 색깔을 기억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내 눈색깔은 맑은 갈색으로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요. 하지만 그건 나를 오래 만난 사람들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알더라도 04처럼 '그런 눈 색깔로 세상을 보면 뭔가 다른 색깔로 보이나요?'라는 질문을 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지나치게 당황했습니다. 그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스무 살 초반 이후로 해본 적이 없거든요. 심지어 그때는 술에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습니다. 우리 학교 교훈이 자유, 정의, 진리였는데 그중에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하냐는 이야기로 장장 네 시간을 싸웠습니다. 결론은 없었지만 꽤 재미있었어요.



 

삶의 낭만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야기 상대는 보통 없어요. 그래서 혼자 대화합니다. 말소리 내는 것은 부끄러워서 머릿속에서 혼자 이야기를 해요. 새벽녘 대전역 어딘가에서 노숙자가 혼잣말을 하는 것을 본 이후로 그렇습니다. 무섭더라고요.

 

그래서 집으로 도망친 나는 조금 괴로워했습니다. '보는 것과 듣는 것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주제가 대화하기에 너무 피곤해서는 아니었습니다. 04는 나와 낭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인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우정 중 어떤 것이 중요하냐는 주제로 싸움박질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04의 이름과 같은 사람들을 전부 모아 '대한민국 04 모임'을 만들 수 있을까요? 개 썰매를 만들기 위해 함께 도끼질을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벽을 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의 직관에는 04는 나와 함께 미친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니 어서 벽을 부수고 들어오세요. 편지가 취미라는 나의 대답에 대뜸 '나한테도 편지를 써 주세요'라고 하는 사람은 그럴 자격이 있단 말입니다. 나의 마음의 벽은 스티로폼과 같습니다. 두터워 보이지만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어요.

 

그리고, 04가 했던 질문의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런 눈 색깔로 세상을 본다고 해서 다른 색깔로 보이지는 않아요. 아마도 내가 세상을 조금 다르게 보는 이유는 멍청하거나 좀 덜떨어져서인 것 같습니다. 이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에서 사는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이라면 굳이 글과 편지를 내리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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