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자주 나타나는 05에게
05에게.
오늘은 책을 버렸습니다. 몸은 한가하고 마음은 번잡하니 정리를 하고 싶어 졌어요. 책장에 있는 책을 하나하나 뽑아가면서 버려야 할 것을 정리했습니다. 몇 년 전에 읽고는 다시 펴보지 않은 책들이 참 많아요. 책이란 것이 참 그렇습니다. 다시 펴보고 싶은 감정이 좀처럼 들지 않아요. 사실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책장 한 구석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든든하기는 합니다.
다시는 볼 것 같지 않은 책들을 골랐습니다. 명확한 기준은 없지만 책을 손에 잡자마자 느껴졌어요. 이 책은 아마 내가 죽을 때까지 다시 펼칠 것 같지 않다는 그런 기분이요. 그런 것들을 골라서 책장 옆에 탑처럼 쌓아 올렸습니다.
그중에 누군가의 필체가 남아 있는 것들은 다시 책장에 꽂아 두었습니다. 선물 받은 책에 가끔 짧은 편지나 글귀가 써져 있는 경우가 있잖아요. 문득 애틋해져서 그 사람들과의 기억을 다시 곱씹었습니다. 내가 짧은 글을 써 둔 책도 있었어요. 가끔 나는 어떤 하루를 기념하기 위해 책을 사서 앞에 글을 적어 둡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중요한 날들이 참 많았던 것 같네요.
책장을 정리하다 보니 예전 사진이 담긴 앨범도 찾고야 말았습니다. 심지어 앨범에 담기지 못한 사진이 들어 있는 상자도 찾았어요. 열어볼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나는 추억에 빠지면 감히 빠져나오기 힘든 너절한 인간임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목소리도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혹시나 연락을 돌릴까 무서워졌습니다. 그래도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커 사진들을 돌아봤습니다.
나를 3인칭으로 바라보는 기분은 꽤 묘합니다. 사실 평소에 스스로를 멀찍이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잖아요. 사진은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심지어 시간을 뛰어넘어서요. 05와의 사진도 있었습니다. 사실 꽤 많았는데요. 뭔가 보고 있으니 나는 참 많은 것을 잃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을 상실해 버렸을까요? 나는 이 편지를 마주하는 와중에도 그것을 생각하고 있으니 05도 함께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진을 보고 있으니 클라우드에 저장해 둔 사진들도 보고 싶어 졌습니다. 거기에도 참 많은 사진이 있었어요. 물론 05와의 사진도 꽤 많았습니다. 하지만 어째 디지털로 저장된 사진들은 별로 와닿지 않더라고요. 동영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화된 사진만이 주는 아련함이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어째 뾰로통해져서 컴퓨터를 끄고 다시 사진을 정리했습니다.
혹시나 옛 연인이 있을까 조마조마하며 사진을 넘겼습니다. 만약 있다면 아주 슬픈 마음으로 사진을 대한 뒤에 맹렬하게 찢어버리려고 했어요. 아무래도 가위는 손맛이 덜하니 두 손으로 난도질을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아주 성실한 과거의 내가 이미 그 작업은 끝내놓은 것 같더라고요. 못내 아쉬웠습니다.
그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니 밖이 어두워졌습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요. 괜히 울적해져서 소파에 앉아 옛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그 어떤 나이에서도 늘 내가 늙었다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중학교 때도 그랬고, 대학생 때도 그랬고, 군대에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어른이라는 것은 속마음을 내비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꽤나 후회되는 것입니다. 솔직하고 싶었던 것들에 그러지 못했던 나날들이요. 나는 왜 솔직한 것이 치기 어린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마도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나마 05는 내가 솔직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사람입니다. 놀랍게도 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내 속내를 잘 내비치지 않아요. 아마 실생활 연기대상을 뽑는다면 장려상정도는 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05에게 꽤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나의 낡은 기억들 속 꽤 많은 곳에 켜켜이 박혀 있어 주어 감사합니다. 몇 군데는 크게 공사해서 잘라내고 몇 군데는 금지구역으로 설정해 두고 들어가고 있지 않지만요. 사실 05에게도 말 못 한 사실들이 꽤나 많습니다. 어떤 것은 05가 들으면 크게 놀랄 거예요. 아무도 추리하지 못할 나의 진심은 대체 언제쯤 세상에 꺼내 놓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