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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지호 Jul 20. 2023

서신 03. 고민을 풍장하여 주세요

늘 걱정이 많은 03에게

03에게.

 

커피는 맛있었습니다. 문득 생각해 보니 커피를 언제부터 맛있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맛이 없을 수가 없었습니다. 쓰거나 시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맛있는 부분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른들이 한없게 이상하게만 보였는데요. 요즘 아이들은 나를 보고 이상하게 여길 것이라 생각하니 커피처럼 조금은 씁쓸합니다.

 

고민을 듣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왠지 해결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엔 더 그랬습니다. 03이 예전에 말했습니다. 해결책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들어줄 사람이 필요할 뿐이라고요. 솔직히 말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줄 수 있었습니다.



 

03은 오늘도 내게 여지없이 고민을 말했지요. 나는 사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케이크를 시킬까 말까를 아주 진중하게 선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표정 연기는 열심히 하고 있었어요. 그런 것이 오래된 버릇이 되었습니다. 왜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내가 해결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면 굳이 들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반항입니다.

 

다만 조금 긍정하는 것은 고민은 타인에게 털어놓을수록 가벼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헤어질 때 03은 아주 가벼워진 표정을 지으며 종종걸음으로 떠나갔습니다. 고민을 들어주어 고맙다는 말과 함께요. 나는 가끔 그렇구나, 와, 아이고, 같은 말을 입에 올릴 뿐이었는데요. 그래도 울적한 것이 조금이나마 가셨다니 다행입니다.



 

걱정은 마음 깊숙이 묻어둔다고 티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03은 시체를 본 적이 있습니까? 어리석은 질문이네요. 시체를 가까이할 수밖에 없는 직업인 사람인데 말입니다. 나는 처음 시체를 목도했을 때의 냄새를 잊지 못합니다. 그 냄새를 시취라고 한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리 땅을 깊게 파 고민을 묻어둔다고 해도 시취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큰 개를 대두한 경찰 몇 명이 03에게 오겠지요. 굴착기를 가져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03의 땅을 파헤쳐 욕보이기 전에 부디 햇볕 가득한 양지바른 곳에 고민을 잔뜩 펼쳐 두십시오.

 

내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구더기가 올라올 때까지,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지켜보아야지요. 숨겨두는 것보다 낫습니다. 어떤 시인이 말했듯, 풍장 하는 것이 좋습니다. 고민을 내어놓고 직시하면 고통스럽긴 합니다만 아주 아름답게 썩고 말 것입니다. 풍장하고 난 고민은 내가 고이 모셔 무덤을 짓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습니까. 술 먹은 밤이면 더 그래요. 몰래 숨겨둔 고민의 영안실을 찾으려 들지 말고 봉긋한 무덤으로 바로 오십시오. 함께 고민의 종말을 목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03은 몰래 고민을 처리하고 난 음침한 표정의 범죄자가 되지 마세요. 나와 함께 아주 슬프고 엄숙한 표정으로 기도합시다. 나는 종교인은 아닙니다만 기꺼이 03에게 그런 서비스를 제공하겠습니다.



 

왜 그러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03이 나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친구가 몇 없잖아요. 그러니 여태 그랬던 것처럼 가끔 응석을 부리고 한숨을 내게 내쉬셔도 괜찮습니다.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나도 분명히 무너질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나를 위해 나의 어떤 것을 풍장하여 주십시오.

 

편지가 음울합니다. 이게 다 03이 계속 의대 실습에 대해 얘기했기 때문입니다. 십이지장 같은 것은 이름만으로도 무섭습니다. 영어로는 잘 못 알아들어서 더 그렇습니다. 졸업을 위해 열심히 하기를 응원합니다. 이따금 고민이 다시 생길 적에는 편지를 주세요. 화상 통화는 조금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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