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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지호 Jul 13. 2023

서신 02. 편지 쓰는 것은 부끄러운 취미입니다

함께 울고 웃던 02에게

02에게.

 

저번에는 잘 들어가셨는지요. 시간을 총총 뛰어넘어버린 안부 인사입니다. 서점에는 함께 가지 못해 미안합니다. 아시다시피 책을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래야만 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말하기는 조금 구차한데요. 저 횡단보도에서 인사와 함께 편지를 건네면 되겠다고 먼저 생각해 버려서 그렇습니다. 그때 그곳이 아니었다면 나는 또다시 편지를 만지작거리다가 가방에 집어넣었을 것만 같습니다.

 

편지 쓰는 것은 부끄러운 취미입니다. 세상이 조금은 그렇습니다. 손으로 적어낸 편지를 주고받는다는 것이 부담스러운 날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편지 쓰는 것이 취미인 사람은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몇 장을 써 내려간 편지를 반으로 접어 찢어버리고는 합니다. 그렇게 버려지는 것을 보면 마음이 울적합니다.



 

플라스틱을 쳐다보는 기분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렇습니다. 02는 배달음식을 좋아하시는지요? 나는 확연히 말할 수 있습니다. 배달음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맛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을 담고 있는 플라스틱 그릇을 보면 기분이 영 좋아지지 못합니다.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은 그야말로 일회용입니다. 버려져야만 하는 것들입니다. 가끔 스스로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굳이 플라스틱 그릇을 박박 닦아 건조대에 올려두기도 했습니다. 나는 버려지고 싶지 않습니다.



 

02는 가끔 나를 찾아주었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지만 괜히 투덜대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찌질합니다. 찌질하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몰라 굳이 사전을 찾았습니다. 보잘것없고 변변하지 못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부정적인 느낌뿐인 것 같습니다. 내가 말하는 찌질함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나는 찌질하다는 것을 그땐 그랬었지, 하고 놀리며 피식 웃을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02도 어지간히 찌질했습니다. 솔직히 그렇지 않은가요? 나는 02가 찌질해서 편했습니다. 02가 이 글귀를 보면 욕을 할 것이 눈에 선합니다만 저는 멀리 떨어져 있으니 맞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찌질한 것 둘은 가끔 모여 서로의 술잔을 채웠습니다. 채운 것이 술인지 한숨인지 뭐 다른 것인지는 아직도 모를 일입니다. 뭔가를 채우긴 했습니다만 결국 비워져 버린 것이 퍽 아련합니다.

 

술을 먹고 길거리에서 펑펑 우는 것이 백미가 아니었을까요. 그야말로 쿨하지 못한 일입니다. 눈이 적당히 떨어지는 밤이었습니다. 그보다 새하얀 옷을 입은 02는 가르랑거리며 울음을 토해 냈었지요. 나는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며 옆에 있었습니다. 괜찮다는 말이 02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나 스스로를 향한 것이었을까요. 02는 나보다 아주 조금 더 똑똑하니 내가 풀이하지 못한 해를 빨리 찾아 내리라 믿습니다.



 

집에 오는 길에 나는 시를 썼습니다. 어간 찌질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만취하여 돌아오는 길에 읊을 시도 없는 인생은 어쩜 그리 불쌍한 인생입니까. 나는 아직 너절한 낭만을 바랍니다. 그때 뭔가 머리에 번쩍이며 들어선 문장은 아래와 같습니다.

 

'눈물로 시를 쓰면 먹먹한 이 종이도 언젠가 마르겠지'

 

분명히 그때는 꽤나 심금을 울리는 문장이었는데 막상 다시 떠올리고 보니 괜히 부끄러워집니다. 나도 02처럼 어지간히 찌질한 인간입니다. 더 부끄러운 것은 혹시나 해서 이 문장을 검색해 봤다는 것입니다. 이승환의 '눈물로 시를 써도'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맹세컨대 나는 그 노래를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만 어째 몰래 표절하고 만 아티스트의 기분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여하튼 나는 그간 재미있었습니다. 02도 재미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02의 성격상 답장을 줄리는 없으니 굳이 바라지는 않겠습니다. 일방적으로 쓰겠습니다. 어떠한 시점에서 부담이 되어버린다면 부디 찢어버리거나 태워버리세요. 원래 대부분의 편지는 그렇게 생을 마감합니다.

 

갑자기 배가 고픕니다. 토마토가 먹고 싶습니다. 토마토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먹고 나면 손을 씻어야 해서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토마토로 만든 음식은 다 좋아합니다. 토마토 수프, 토마토 파스타, 토마토 볶음, 토마토 잼... 02도 어디선가 토마토를 즐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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