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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지호 Jul 17. 2023

서신 01. 하여튼 당신은 첫사랑이 아닙니다

졸업앨범 속의 01에게

01에게. 


초등학교 둘레를 걸었습니다. 교정을 걸었습니다,라고 표현하면 더 좋을 텐데요. 철문은 누구보다 더 높게 닫혀 있었습니다.


여기 졸업생인데요,라고 시작하는 문장을 수의 아저씨께 말하기에는 서로 곤란해질 것 같았습니다. 또 그 옛날처럼 담을 넘어갔다가는 더할 나위 없이 곤란해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동네 마실 나온 사람처럼 학교를 빙 둘러 걷는 것뿐이었습니다.


사실 나는 졸업생도 아닙니다. 그래도 초등학교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자연스럽게 이곳이 생각이 납니다. 그것 아세요? 정문 앞에 있는 떡볶이집이 자취를 감췄습니다.


다른 사람이 장사한다거나 아니면 다른 간판이 들어섰다고 하면 이렇게까지 허탈하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예 건물이 사라지고 새로 생겼습니다. 높다란 건물입니다. 나는 초등학교 앞 분식집을 허물고 거대한 요양원을 짓는 인간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얼마 하지 않은 돈으로 떡볶이를 참 많이 먹었습니다. 떡볶이를 다 먹고 남은 그릇을 내밀면 아주머니는 그릇에 오뎅 국물을 채워주셨습니다. 떡볶이 국물과 오뎅 국물을 섞어 마시는 것이 내 최대의 별미였습니다. 어릴 적 버릇은 사실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다만 그렇게 먹는 것이 왠지 부끄러워 혼자 있을 때만 몰래 그렇게 먹습니다. 다행히 아직 들킨 적은 없어 구차하게 그날의 추억을 설명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떡볶이와 오뎅 국물을 다 먹고 01의 어머님의 차를 기다리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의 초등학생들은 학년이 끝나면 새로운 책을 바리바리 싸 들고 집에 가야만 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책이라는 것이 왜 그렇게 무거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책을 노끈으로 묶어 양손에 들고 집에 가는 것은 초등학생에게는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읽기' 책이 제일 두꺼웠지요. 내가 가장 좋아하던 책이었습니다. 이야기가 많았으니까요. 초등학생의 취미가 책 읽는 것이라는 것은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01에게 말고는 진실을 고한적이 없습니다. '읽기' 책이 제일 재밌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공부는 하지 않았어도 점수는 잘 받았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 나는 그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바였습니다. 왜냐하면 01의 어머님께서 저와 01이 함께 영어 공부를 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초등학생 때부터 영어 과외를 한 엘리트일까요, 저는. 사실 단어를 외우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영어 단어를 외우면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그간 배운 영어로 'We are not studying'까지 매직으로 써 버렸습니다. 그다음 단어는 'machine'이었는데요. 철자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왠지 그 단어까지 썼다간 혹시라도 그 낙서를 본 우리 어머니가 01과의 공부를 취소하게 할 것 같았습니다.


맞아요. 내가 울면서 단어를 외웠던 이유는 01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마지막 단어를 쓰지 않으니 '혁명'보다는 '반항'에 가까운 문장이네요.


그 영어 수업이 끝났던 이유는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 보통 내 인생의 일련의 사건 중에 명확하지 않은 것들은 감정이 사실을 압도했기 때문인데요. 나는 01과의 수업이 끝났다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망한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가끔 초등학생의 감정은 재미있어요. 모든 것을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도 조금 그래요. 또 그런 것이 글을 쓸 때는 꽤 도움이 됩니다.




굳이 이 말을 다시 하는 것은, 최근에 첫사랑에 대한 정의를 새로 했기 때문입니다. 01은 몰랐겠지만 01은 그전까지 나의 첫사랑이었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이제는 아니에요.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긴 하지만 확실한 것은 01은 나의 첫사랑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냥 인생 가장 처음으로 좋아해 본 사람 정도로 정의될 것 같아요. 혹여 나도 불만이 있으시거든 정식으로 거절 절차를 밟으십시오.




내가 지금 가장 크게 하고 있는 고민은 이 편지를 당신에게 어떻게 건넬까라는 것입니다. 시공간적으로는 아무래도 무리지요. 당신은 이 땅에 있지 않으니까요. 아, 사실 고백하자면 내가 세상을 여행하고 있을 때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들리는 건 어때?'라는 당신의 말에 나는 모든 여행 계획을 백지로 돌릴 뻔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던 이유는 뭐. 현실적인 이유였지요. 돈이 없었거든요. 지금 내가 새로이 첫사랑으로 정의한 사람은 만약 돈이 부담이 된다고 해도 찾아갈 사람이니 분개하셔도 좋습니다.


여하튼, 나는 쓴 것을 캡처하여 당신에게 보낼지 아니면 대뜸 주소를 알려달라고 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글 쓰는 것보다 글 보내는 방법이 더 어려운 요즘입니다. 고민은 조금 많이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도 염치란 것이 있거든요. 하여간에 이 글이 01에게 닿게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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