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람은 산을 닮고 바닷사람은 바다를 닮는다는 말이 있다. 사는 환경이 사람에게 큰 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기억을 헤집어보면 나는 높은 곳에 사는 사람이었다. 지위나 재력이 아니라 정말 높이가 높은 곳에 살았다. 어렸을 적 대부분의 기억은 이십오 층 우리 집에서 바깥을 구경하는 것에 걸려 있다.
지금이나 그때나 높은 곳을 두려워해서 보통은 창틀을 꽉 잡고 머리만 빼꼼 내밀어 많은 것을 구경했다. 높은 곳에서 보는 세상은 참 작았다. 얼굴은커녕 키도 짐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종일 길을 오갔다. 표지판 두 어 개를 가져가 두고 축구를 하는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사실 아이들의 말소리라고 해 봐야 공이 들어갔을 때의 기합 소리나 크게 다쳤을 때의 비명 소리뿐이었다.
나이를 차곡차곡 쌓으며 높은 곳에서 세상을 구경하는 시간은 빠르게 줄어갔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해야만 하는 것들이 폭폭 쌓였다. 해야만 하는 것은 보통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었고 높은 곳에 살던 꼬마는 일 층으로 내려가 많은 사람을 만나야만 했다. 점점 집에 있는 시간은 줄었고 때로는 며칠을 낮은 곳에서 살아야 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가끔은 집에 돌아와 창문을 열고 밖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이미 밖은 어두워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고 서울 하늘은 별을 보여주기에는 너무 두터웠지만 나는 그 시간을 꽤 즐기고는 했다. 가장 좋은 점은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낮은 곳에서의 시간은 낯선 목소리 투성이었다. 소리는 단어를 말했고 단어는 문장이 되었다. 가끔 문장은 너무 날카롭게 벼려져서 다른 사람을 찌르거나 자기 자신을 베어 버렸다. 그러나 사는 것은 소리 속에 몸을 묻는 일이었다.
예리한 문장만 문제인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소리에 뭉뚝한 무게가 느껴졌다. 한숨 몇 번이나 자조적인 욕 몇 번이 함께 섞인 문장은 듣는 내게 알 수 없는 부담이 되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 문장을 걱정이라고 불렀고 다른 사람들의 걱정은 그저 잠시 듣고 잊어버리면 되는 것으로 여겼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타인의 걱정이 향기처럼 금세 날아가 버리는 것이었지만 내게는 그렇지 못했다.
내게 다른 사람의 고민은 후각적인 것이 아니라 촉각적인 것에 가까웠다. 실체는 없지만 무게가 느껴졌다. 나는 당신들의 고민을 듣고 침대 위에서 몇 번을 곱씹었다. 대부분 해결할 수도 없고 해결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몇 명은 내게 멍청하다고 하고 몇 명은 내게 착하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난 멍청하지도 착하지도 않았다. 그저 감정의 감각이 다른 것뿐이었다.
이사를 해 예전처럼 높은 곳에 살진 않았지만 창문에 턱을 괴고 바깥을 구경하는 버릇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멍하니 창밖을 구경했다. 베인 상처를 햇볕에 말리고 심장 언저리에 느껴지는 무게감을 털어내려 노력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일 낮은 곳에 다시 내려갈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 소심한 성격은 내가 높은 곳에 살던 사람이어서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편했다. 어느새 차가워진 가을 공기를 힘껏 폐에 눌러 담았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뱉어 냈다. 들리는 것은 내 큰 숨소리뿐이었고 침묵 속에서 다시 내일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