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불가리아 소피아 (2)

두 번째 한국인

by 석지호

정식 출간 예정입니다 !

https://tumblbug.com/balkantravel


이불을 한껏 끌어당겨도 추위가 가시지 않았다. 잠결에 바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창문을 열어놓은 것이 분명했다. 무거운 몸을 침대에서 끌어내려 창문을 꼭 닫았다. 범인은 콜롬비아에서 온 제이인지 이탈리아에서 온 엔리코인지 아니면 늦게 들어와 아직 통성명하지 못한 세 번째 자리 주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문득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불가리아를 찾는 사람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인간들이었다.


“아 진짜 먹을 놈들! 추워 죽는 줄 알았네.”


중학교 때 친해졌던 지훈이는 늘 ‘먹을 놈들’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공사장에서 천 원을 삥 뜯었던 형도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아 자신을 혼냈던 선생도 지훈이에게는 다 ‘먹을 놈들’이었다. 지훈이의 집에서는 축축한 냄새가 났다. 얼굴이 늘 취기에 붉었던 지훈이의 어미는 지훈이를 ‘먹을 놈’이라고 불렀다. 그것이 빌어먹을, 글러먹을, 막돼먹을 놈을 줄여 말하는 것임을 알게 되기에는 꽤 시간이 흘렀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지훈이의 교복에서는 축축한 냄새가 났다. 지금 그가 밥이나 먹고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짧고 함축적인 단어는 내 기억 한편에 아직도 남아 있다.


조식은 맛이 없었다. 하긴 호스텔에 화려한 조식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은 생각이긴 했다. 삶은 계란 위에 베이컨을 올려서 우물우물 씹었다. 불가리아 우유에서는 묘하게 신 맛이 났다. 컴플레인을 해야 하는 건지 고민했지만 다들 별 말이 없길래 불가리아 우유에서는 원래 그런 맛이 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한 명의 동양인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다시금 굉장히 불안해졌다. 어제 엔리코와 한 짧은 대화가 생각이 났다.


“너 한국 사람들은 하나 엄청난 능력이 있는 것 알고 있어?”


“매운 거 먹으면서 스스로 고문하는 거?” 엔리코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한국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서도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을 구분할 줄 알아.”


나는 완연한 한국 사람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한국인도 완벽한 한국인임이 분명했다. 그는 ‘혹시’로 시작해서 ‘한국 분이세요?’로 끝나는 마법의 문장을 입에 올렸다. 이쯤 되면 운명인 것 같았다. 나는 한국어에서 도망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세계 여행을 하고 있다던 재훈은 아직 빈 방이 없어서 체크인 시간까지 시간을 때워야만 하는 모양이었다. 그와 몇 가지 수더분한 얘기를 하다가 혹시 저녁에 시간이 괜찮으면 김치찌개나 한 술 하자는 약속을 하고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P20221218_104500560_38E40498-177D-499E-9C0C-8A3B3981E87A.HEIC


막상 나오니 갈 곳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어디를 가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도 여행이랍시고 유럽 땅을 밟았으면 유명한 곳도 좀 보고 맛있는 것도 좀 먹어야 할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가리아의 수도가 소피아라는 것도 사실 어제 알았기 때문이다. 정처 없이 사람들이 그나마 많이 보이는 곳을 따라 걸었다. 공사를 하고 있는 곳이 많았다. 아니 공사 소리가 영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공사를 하다가 멈춘 곳이 많은 것 같았다. 어딜 가나 멈춘 공사 현장들이 즐비했고 어김없이 그 근처에는 그라피티가 있었다. 그라피티를 하나 볼 때마다 미술관에서 명화를 보는 사람처럼 멈춰 섰다. 그 짧은 시간에 멈춤이 열 번 정도 됐을 때 불가리아인은 죄다 그라피티를 그리지 못해 미쳐 있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커피를 마시면서 와이파이를 연결했다. 정보의 바다에 익사하고 싶지 않다던 결심은 정보 하나 없는 불편함 속에서 사라졌다. 불가리아를 검색하고 소피아를 검색했다. 우연히 소피아 무료 도보 투어가 있다는 포스팅을 보았다. 때마침 거리도 멀지 않았고 시작하는 시간도 완벽했다. 반이나 남아 있던 커피를 입에 붓고 무료 투어가 있다는 사자 상을 찾아 나섰다. 어렵지 않게 찾았던 사자 상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서 있었다. 들고 있는 표지를 살펴보니 심지어 영어로 하는 투어와 스페인어로 하는 투어가 나눠져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이 많다는 것은 내게 꽤 중요한 것이었다. 늘 혼자 여행하던 나는 몇몇이 뭉쳐 자유롭게 다니는 것만이 진짜 ‘자연식 여행’이고 무리 지어 몰려다니는 가이드 투어는 가짜 ‘인스턴트 여행’이라는 묘한 특권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P20221218_115142394_910108EA-6351-4BB5-833B-C4D520B6D4A7.HEIC

멍청한 자존심을 챙기면서 소피아에서 갈만한 곳을 알아보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투어가 시작되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떠나자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가이드가 무언가를 설명하면서 서 있으면 나도 저 멀리서 멈춰 있었다. 그들이 떠나면 그제야 그 자리에 가서 대체 뭘 보면서 설명하고 있었나 상상하며 두리번거렸다. 기묘한 동행은 꽤 오랜 시간 지속됐다. 사람들이 지하수를 긷는 곳이나 고대인들이 애용했다는 목욕탕 터나 대통령 궁 비슷한 것을 지나쳤다.


나는 한 곳에서 멈춰서 더 이상 무리를 따라가지 않았다. 구글 맵에는 그 위치가 ‘소피아 알렉산드르 넵스키 대성당’이라는 절대 한 번에는 외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이름으로 적혀 있었다. 나는 종교도 없으면서도 무릇 큰 종교 건물을 보면 압도되는 경향이 있다. 더럽게 큰 성당 안에는 이름 모를 사람들이 의미 모를 대화를 하며 알 수 없는 기도를 했다. 아마도 이 성당의 모든 프레스코들은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의 소원을 늘 듣고 있을 것이었다.


막상 기도를 하고 소원을 말하자니 딱히 원하는 것이 없었다. 세계 평화나 인류애 충전 같은 이타적인 소원은 별로 빌고 싶지 않았다. 실례지만 소원은 가불 하겠다는 발칙한 말을 하고 성당을 구경했다. 긴 구경 속에서도 딱히 바라는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성당을 나서자 빗방울이 떨어졌다. 소원이 하늘에 닿지 못하고 구름에 막혀 비처럼 내리는 것 같았다. 소원들을 맞으며 다시 정처 없이 길을 걸었다. 나는 아직 소원을 빌지 않았으니 이 빗방울처럼 무효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2812)


keyword
이전 02화불가리아 소피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