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켓을 사고 음식을 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웃는 것
정식 출간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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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 코너에 들어선 노인의 기분을 느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에 둘러싸이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하필 나만 그 의미를 알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있다면 그 두려움은 조금 더 커진다. 강남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한글보다 영어가 많다는 것이 느껴진다. 나야 괜찮지만서도 가끔 나이 든 분들의 공포감은 어떨지 계산해 본다. 강남 거리뿐만이 아니다. 선 크림 하나만 사려고 해도 주차장 ‘B2’ 층에 ‘SM3’를 주차하고 ‘이마트’ 옆에 있는 ‘올리브영’ 코너에서 ‘선 크림’을 구매하고 ‘포인트’를 적립해야 하는 세상이다. 어떤 성전이라도 일어나 영어 대신 아랍어가 통용되는 세상이 오는 것을 생각해 본다. 꼬부랑글씨를 앞에 두고 요즘 것들은 겉멋만 들었다며 크게 화를 내야겠다.
어제 조금 공부해 둔 키릴 문자는 꽤 큰 도움이 되었다. 아예 읽을 수 없는 것과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는 것에는 차이가 크다. 소피아와 플로브디프라는 짧은 지명을 읽는데 앞사람 두 명이 티켓을 구매하고 돌아설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짧게 인사하고 플로브디프행 티켓을 구매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대화가 통하는 경험은 늘 흥미롭다. 직원을 바라보고 부디 내 발음이 맞기를 기도하며 플로브디프라고 말했다. 직원은 시간표를 가리켰고 나는 핸드폰 달력을 꺼내서 내일 티켓을 원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그 표정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제대로 산 것을 보니 완벽한 표정이었던 것 같다.
이 단출한 성공이 너무나도 기뻤다.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것은 행복의 역치를 참 많이 낮추어 준다. 버스 티켓을 사는 것도, 음식을 주문하는 것도,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도 그들에겐 그저 삶일 뿐이지만 나에게는 충분한 도전이 된다. 그리고 대화의 끝에 그들의 언어로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꽤 따뜻한 칭찬을 받는다. 당연한 것에 칭찬을 받는 것은 모국어로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외국어로는 꽤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나는 칭찬받지 못해 시름시름 말라가는 너절한 어른일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성공을 칭찬하고자 불가리아 음식을 먹어 보려 걸음을 옮겼다.
하드지드라가노브의 집이라는 곳이었다. 문 앞에서 가게 이름을 발음해 보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다행히 문 여는 것은 실패하지 않았다. 가게는 따뜻한 분위기였다. 불가리아 전통 옷처럼 보이는 것들이 이곳저곳에 걸려 있었고 어디 동굴 어디선가 베껴 온 것 같은 벽화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식사하는 곳에 혼자 식사하러 들어가는 것은 무언가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친구가 없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기분이다. 사실 그것은 거의 명확하게 맞는 명제이지만 그래도 막상 지적받으면 조금은 부끄러워지는 법이다.
양고기 수프를 고르고 조금 고민했다. 영어로 적힌 조악한 설명만으로는 메인 음식이 대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데이터가 없는 상황에서 직관은 꽤나 필요한 능력이고 나는 늘 내 직관이 평균점은 넘지 않는가 하며 자만하고는 한다. 이름 모를 음식을 하나 골라 함께 주문했다. 양고기 수프는 익숙한 맛이 났다. 조금 이국적인 갈비탕 맛이었다. 딱 국물에 밥 말아먹으면 하루 든든할 것 같은데 밥은 없고 빵이 나왔다. 빵은 주문하지 않았는데 나온 걸 보면 딱 우리나라 공깃밥 포지션인 것 같았다. 빵을 양고기 수프에 찍어 먹었다. 따뜻하게 행복해졌다.
정체 모를 음식이 하나 나왔다. 고기와 치즈를 뒤섞어 뚝배기 같은 것에 요리한 음식이었다. 직원에게 음식 이름을 발음하는 방법을 물어봤다. 직원은 성심성의껏 가르쳐 주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결국 발음하지 못하고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한 입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직원에게 다시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불가리아 사람들은 고기와 감자와 치즈만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직원과 짧은 대화를 했다. 나는 여기서도 익숙한 질문을 마주했다.
“한국 사람이라고? 왜 불가리아에 왔어?”
“이거 먹으려고 온 것 같은데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직원은 다른 불가리아 음식들과 소피아에서 가볼 만한 곳을 추천해 줬다. 사실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늘 그렇듯 사람과의 대화가 꼭 서로를 이해해야만 필요하는 것은 아니다. 따봉 몇 번으로 우리는 아마 누구보다 명확하게 대화했을 것이다. 만족하고 나와서 버스를 타고 가까운 시장으로 향했다.
‘여자들의 시장’이라는 이름의 장소였다. 졸고 있는 상상력을 깨우는 이름이었다. 여자만 물건을 팔고 있는 시장인지 여자들이 필요한 물품을 파는 시장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여자만 이용할 수 있는 곳일 수도 있었다. 혹시라도 동유럽 미녀들만 있지 않을까 하는 묘한 상상 속에서 나는 아직 불가리아 번호가 없는데 불가리아에서는 인스타그램을 자주 쓰는지에 대한 큰 고민을 했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결혼하면 여자가 성을 바꿔야 한다던데 그럼 한국에서 혼인신고를 하면 성을 바꿔서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심할 때쯤 시장에 도착했다. 아저씨들이 많았고 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귤이 싸길래 귤을 한 아름 사서 호스텔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