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안
정식 출간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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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이했다. 거리에는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서 로비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찍었던 몇 장 없는 사진을 보면서 일기를 썼다. 글 한 편 쓸 시간이 지나자 아무도 없었던 로비에 한 명이 들어왔다. 그녀는 커피 한 잔과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러니까 내가 리안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된 계기는 우연이었다는 뜻이다.
리안은 지나치게 솔직한 여자였다. 살다 보면 그런 사람들을 몇 만난다. 숨겨야만 할 것 같은 이야기들을 아무렇지 않게 뱉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문장 마지막에 ‘이 말은 네게만 하는 거야’를 버릇처럼 붙인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여태 했던 말들이 거짓말인지 그 문장만 거짓말인지 헷갈리고는 한다. 나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리안은 그런 여자였다. 조심성 하나 없는 맹랑함을 일찍부터 듣는 것은 꽤 피로한 일이었다. 나는 주근깨가 인상적인 여자가 정신병에 걸린 일가족과 전부 절연하고 만난 남자친구가 자신을 때리고 나서 무릎 꿇고 술을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며 빌고 있다는 이야기를 길게 듣고 있었다.
“그런데 넌 뭘 쓰고 있는 거야? 너 작가야?” 리안이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작가는 아니고 그냥 취미 같은 거야. 한국에서 작가를 하려면 자기소개에 정신병 몇 개가 있다거나 자살 시도 몇 번을 했다는 것 정도는 언급해야 하거든.” 내가 대답했다.
리안은 깔깔 웃으면서 이유를 물었다. 나는 한국 서점 매대에 걸려 있는 에세이들은 대부분 그렇다고 대답했다. 마치 책을 내기 위한 자격조건 같았다. 나는 쓸데없이 솔직한 책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우울증 덩어리인 그런 것들을 읽으면 괜히 피곤해졌다. 그래서 서점에 들르더라도 에세이 코너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늘 에세이를 썼다. 모순 덩어리인 삶이다.
리안은 내 글들을 읽고 싶다고 했다. 누군가가 내 글에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마케도니아 사람에게 한국어로 된 글을 보여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내 글을 복사하여 구글 번역기에 붙여 넣었다. 한국어는 영어로 바뀌었고 영어는 마케도니아어로 바뀌었다. 세상에 공개되지 않을 글들을 굳이 번역까지 해서 보여주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글을 읽었다. 로비는 삼십 분 정도 완벽하게 고요했다. 나는 그동안 어제 갔던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대한 글을 완성했다. 일기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고 여행기도 아닌 무엇인가를 다 써냈다.
“되게 슬픈 것 같아.” 조용히 있던 리안이 말했다.
“너는 되게 인생을 슬프게 바라보는구나. 글들이 그래. 그런데 네 인생은 안 슬퍼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슬퍼하는 게 되게 특이해. 보통은 자기 사는 게 제일 슬픈 게 당연하거든.” 리안이 이어서 말했다.
대답하는 것이 어려웠다. 아무래도 내 취미는 모든 것들에 슬퍼하는 일이었다. 슬픈 것은 우울한 것이나 무기력한 것과는 달랐다. 오래 씹은 슬픔은 쓰지 않고 꽤 단 맛이 난다. 어떤 고급 소금과도 같다. 여기저기서 눈물을 모은다. 눈물을 잉크 삼아 글을 쓰면 언젠가 말라 자국만 남는다. 그 눈물자국에서 소금기를 조금씩 모아 둔다. 나는 내 눈에 보이는 슬픔을 잘 모아 말려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었다. 그 사람은 삶을 보는 내 시선을 참 좋아했다. 지금은 뭐 하고 사는지 알 방법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 말들을 리안에게 쏟아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저녁을 함께 먹자는 이야기를 했다. 리안은 마케도니아에서 꼭 ‘샵스카’를 먹어봐야 한다고 했다. 다양한 채소들을 썰어 넣고 그 위를 치즈로 덮은 샐러드 비슷한 음식인 것 같았다. 내 ‘샵스카’에는 토마토와 오이와 양파가 가득 들어 있었다. 숟가락 가득 오이와 치즈를 퍼 먹으면서 리안과 실없는 대화를 했다. 주로 발칸 반도에 대한 얘기였다. 그녀는 발칸의 모든 나라가 알렉산더 대왕과 마더 테레사가 자기 나라 사람이라고 소리 높인다고 했다. 하긴 그들이 살았던 시절에는 국경이 달랐을 테니까 이해가 됐다. 발칸 반도는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복잡하고 얽혀 있는 것 같았다.
리안은 주로 말하는 쪽이었고 나는 주로 듣는 쪽이었다. 가게에서 나와 함께 걸었고 해가 지고 난 알렉산드리아 광장을 보러 갔다. 가족들과 거지들이 많았다. 같은 크리스마스이브지만 사람마다 다르게 적힐 하루였다. 맥주를 사서 마셨다. 리안은 주로 듣는 쪽이었고 나는 주로 말하는 쪽이었다. 우리는 아마 평생을 서로 다시 보지 못할 사이였다. 서로는 마지막이라는 용기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가 감정의 찌꺼기를 토해내도 내일이면 ‘쟤는 외국인이니까’라는 말로 용서가 될 것이었고 일주일만 지나면 크게 기억나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가 왔고 나는 꿈 없는 잠을 푹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