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을 앓았다
정식 출간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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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오랜 시간 몸을 맡겼다. 캐리어는 엉망진창이었다. 내 몸은 더 엉망진창이었다. 쉬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호스텔 도미토리가 아닌 적당한 호텔을 예약했다. ‘아릴라 부티크 호텔’은 밖에선 전혀 호텔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내부는 완벽한 호텔이었다. 방에 들어가고 나면 내일까지 못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에 대비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구운 닭 두 마리와 물 세 병을 미리 사서 방에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나서 약을 먹으려고 작은 가방을 찾았다. 분명히 배낭 안쪽에 넣어 두었던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약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가방엔 여권과 카드도 함께 들어가 있었다.
방을 뒤지기 전에 머릿속을 샅샅이 파헤쳤다. 체크인했을 때 분명히 여권을 보여주고 돌려받은 기억이 났다. 그 이후에 여권을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타지에서 여권이 없어지는 것은 굉장히 곤란한 일이다. 영사관을 찾아 헤매야 하고 내 신분을 증명해야 하고 여권을 발급받을 때까지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도 어려웠다. 물론 소문으로만 들어본 일이었다. 나는 여태 어떤 곳에 가더라도 여권을 잃어버리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고 여권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멍청한 사람들일까 궁금해했다. 멍청한 사람은 비명을 지르는 몸을 끌고 방과 캐리어를 전부 파헤치기 시작했다. 작은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주머니 하나하나를 붙잡으며 희망을 가졌다. 희망이 부서지는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내 물건을 방 맨 왼쪽에 다 쌓아두고 하나씩 검토했다. 검토가 끝난 짐은 방 오른쪽으로 옮겼다. 캐리어에서는 기껏해야 다 써버린 교통카드나 박물관 티켓이 굴러 나왔다. 열어보지도 않았던 방 서랍과 들춰보지도 않았던 카펫 밑을 뒤졌다. 당연히 있을 리가 없었다. 다시 모든 주머니를 탈탈 털고 옷가지를 뒤집어가며 실마리를 찾았다. 아무것도 없었고 나는 구운 닭을 샀던 음식점까지 땅바닥만 쳐다보며 느리게 걸었다. 식은땀이 계속 났다. 음식점 사장도 호텔 로비 직원도 여권의 행방은 알지 못했다. 온몸에서 열이 났다. 여권이 들어있는 가방은 결국 화장실 변기 위에 있었다.
열병을 앓았다. 열병이라는 단어를 입에 굴려 보면서 천장을 바라봤다. 마른기침을 몇 번 하고 콧물을 훌쩍였다. 눈이 뻑뻑해 눈을 감고 이마에 손을 댔다. 열이 났다. 한국에서 가져온 신속항원검사 키트 세 개는 가지런히 한 줄만 나온 채로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마케도니아를 떠나올 때 리안이 감기가 유행하니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이 났다. 아무래도 감기가 확실했지만 오늘은 감기보다는 열병이라 말하고 싶었다. 챙겨 온 감기약을 입에 넣었다. 열병에 드는 약 같은 부끄러운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약을 먹고 오래 잤다. 여전히 열은 내려가지 않았고 온몸에서는 땀내가 났다. 빨리 나아야만 한다고 되뇌며 몸을 뒤척였다. 난방을 틀었다가 껐다가를 반복했다. 이불을 덮었다가 발로 차 버리는 것을 계속했다. ‘긴 옷을 챙겨 다닐걸’ 이라거나 ‘술은 적당히 마실걸’이라고 후회를 조금 했으나 이대로 누워 있는 것도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냉장고를 열었다. 그릇에 옮겨 데워 먹을 기력도 없어 닭다리 하나를 입에 욱여넣었다. 오렌지 하나를 씹으며 다른 하나는 얼굴에 굴렸다. 오렌지는 금세 미지근해졌다.
무릎이 뜨거워지는 기분이라 무릎을 매만졌다. 열이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았고 역시 감기약은 열병에는 별 효과가 없나 싶었다. 모든 것이 뜨거웠다. 다시 선잠을 자다가 깼다. 평소 꾸지도 않았던 꿈을 몇 편 꿨다. 꿈에 나오는 사람들과 그들이 있는 장소는 계속 바뀌었다. 꿈에서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계속 화를 냈다. 지휘관 방에서 제발 헛소리 좀 하지 말고 사람 좀 되라고 소리쳤다. 병사 생활관에서는 나 좀 제발 그만 괴롭히라고 일갈했다. 전역했으니 취직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던 친구들에게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묻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 말 안 하고 있는 엄마나 그저 웃고만 있던 글쓰기 모임 사람들에게도 내 삶에 그만 관심을 가지라고 화를 냈다. 심지어 인터넷 익명게시판을 이용하고 있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도 열을 올렸다. 현실에선 나 대신 내 몸이 열렬히 화를 냈다. 아무래도 열병임이 확실했다.
꼬박 이틀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조식을 먹을 때를 빼놓고는 방 밖에서 나오지 않았다. 잠을 자거나 생각을 했다. 머릿속에 무엇인가 계속 떠오른다는 것은 지옥 같은 일이다. 몸상태가 영 좋지 않았지만 태블릿을 켜서 조금씩이라도 글을 썼다. 그럴 때만 그나마 괜찮아졌다. 타이레놀이나 이부프로펜보다 효과적인 해결 방법이었다. 나는 어떤 부담감과 열등감과 두려움 같은 것을 짊어지는 것에 지쳐버린 모양이었다. 한국어를 그만 듣고 말하고 싶다는 마음은 결국 무거운 것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역설적으로 한국어로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발코니에는 따뜻하게 햇빛이 비췄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알바니아어가 골목에서 울려 퍼졌다. 무섭다고 소리를 치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는 못해 다시 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