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과 전쟁
정식 출간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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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는 것이 힘에 부치지 않았다. 베개도 식은땀으로 젖어있지 않았다. 아픔은 가끔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모습을 감춘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좋은 신호였다. 호텔 조식은 뷔페가 아니라 직원이 가져다주는 방식이었다. 버터 바른 빵, 베이컨, 계란과 몇 종류의 과일이 나왔다. 삼일 내내 단 하나도 다르지 않은 음식이었지만 맛있게 먹었다. 두 번의 조식은 전혀 맛을 느끼지 못했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빵은 이런 맛이 나는구나 하며 새삼스럽게 놀랐다.
짧은 코소보 여행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다음 여행지로 알바니아를 추천했다. 코소보 사람들의 두 번째 조국은 알바니아인 것 같았다. 코소보를 여행한 이상 세르비아에 갈 수는 없었으니 자연스럽게 기수를 서쪽으로 돌렸다. 천천히 걷기 좋은 날이었다. 날이 맑고 하늘이 높았다. 생각해 보니 발칸 반도에 와서 숨쉬기가 어렵거나 가래가 끓는 날이 없었다. 숨 쉬는 자유를 만끽하며 티라나 중심부에 있다는 ‘스칸데르베그 광장’을 찾아 걸었다. 세계 어디에나 광장이 있다. 그 어디에나에 있는 광장들은 분명히 꼭 가봐야 할 곳 몇 순위 차트 안에 이름을 올리곤 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광장에 가면 크게 할 것이 없다. 굳이 맛없는 음식과 비싼 기념품과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광장은 그런 곳이다.
‘스칸데르베르 광장’은 내가 생각하는 광장의 범주 안에 있지 않았다. 나는 왜 수도의 한복판에 있는 광장에 놀이동산이 설치되어 있는가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하이라이트가 끝난 축제의 마무리에 서 있는 것 같은 놀이동산이었다. 구경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활기차지 않았고 가건물에서 기념품을 판매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열성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적당한 온도와 미소로 서로를 대했다.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보통의 축제는 감정의 온도가 너무 높아 멀리서 지켜보는 편이지만 이 미지근한 느낌의 행사는 발 담그기에 딱 좋았다. 주책맞게 솜사탕을 하나 사서 관람차에 올랐다.
알바니아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어째 광장의 사람들이 목욕탕 한 구석에 있는 이벤트탕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렸을 때 가끔 가던 대중목욕탕에는 요일마다 탕의 향기가 바뀐다는 이벤트탕이 있었다. 정말인지 궁금해서 친구들을 졸라 이틀 연속으로 목욕탕에 간 적이 있다. 향기는커녕 색깔도 바뀌어 있지 않아 큰 실망을 했었다. 그래도 이벤트탕은 늘 너무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좋은 냄새가 나서 사람을 편하게 했다.
범퍼카를 타고 나와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범퍼카를 탄 기억은 십 년 전에 걸려 있었다. 갑자기 조금 부끄러워졌지만 확실히 재미는 있었다. 속도를 크게 내지도 못하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모르는 사람들과 차를 부딪히는 것뿐인데 왜 재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긴 그러한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이 행복을 가져오는 데는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아이스크림도 마찬가지다.
눈이 계속 마주친 아이스크림 가게 직원과 인사를 했다. 말을 걸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유창한 영어로 한국인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나도 삼 일 전까지만 해도 알바니아 사람은 보지 못했다고 웃었다. 대화는 발칸 반도에 있는 나라들의 통과 의례와 같은 질문인 ‘알바니아엔 어떻게 오게 됐나요?’로 흘러갔다. ‘이제 알아보려고 한다’고 웃으면서 티라나에서 갈 만한 곳을 그에게 물었다. 그는 활짝 웃으면서 가볼 만한 곳 몇 군데를 내 구글 맵에 표시해 주고 하나하나 설명해 줬다. 사실 조금 놀랐다. 길을 걷다 마주친 외국인이 서울에서 갈 만한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나는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아마도 검색창에 서울 당일 투어를 찾아보고 여긴 죄다 별로라는 생각이나 할 모양이었다.
가게 직원이 추천해 준 장소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벙커였다. 그 전쟁 게임이나 총 게임을 하면 늘 나오는 사람이 숨을 수 있는 장소 말이다. 이야기를 듣자니 독일이 시작했던 세계 대전 당시 폭격을 피하기 위해 수도 곳곳에 벙커를 설치했다는 것 같았다. 철거한 것도 많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놔둔 것도 많았고 그래서 도시를 걸어 다니면 벙커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불가리아는 그라피티로, 마케도니아는 동상으로 기억에 남았다면 어째 알바니아는 벙커로 추억 속에 남을 것만 같았다. 심지어 조금 큰 규모의 벙커는 박물관처럼 만들어서 구경하기에 재밌다고 했다. ‘BUNK’ART’ 라는 이름의 장소였다. 수도에 두 군데가 있는데 할 일도 크게 없어서 두 군데 다 가보기로 했다.
“지휘통제실인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확실히 그랬다. 비행단에서 삼 년을 근무하면서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지휘통제실이었다. 뭔가 세계대전 시절의 대형 벙커라고 해서 조금 특이한 것을 기대했지만 조금 실망했다. 다른 여행자들은 엄청 신기해하면서 돌아다니고 사진을 찍고 돌아다녔다. 나는 불과 한 달 전에도 늘 봐야 했던 것들을 바라보며 허탈해했다. 아는 것이 있으면 지루해진다. 화생방 장교였던 나는 더욱 그랬다. 굳이 밑에 적혀 있는 긴 설명글을 보지 않아도 ‘이 소대는 방독면에 보호의 입고 누적선량 측정하면서 다녔겠구나’ 라거나 ‘이 소대는 중형 제독기 들고 하루종일 물 뿌리고 다녔겠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수통이며 화생방 방호시설이며 어째 다 이해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지휘통제실 어딘가에 짱 박혀 있는 간부용 침대마저 생긴 게 비슷했다. 군인들의 미적 감각은 어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관된 스타일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 미적 감각마저도 교본이나 예규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벙커에서 나와서 부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주임원사님께 사진을 몇 장 보냈다. 군대에도 분명 좋은 사람은 있다. 몇 안 되는 좋은 사람 중에 한 명이 최해영 원사님이었다. 평생을 방독면과 특수보호의 사이에서 살아온 최 원사님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 좋은 친구가 되어주셨다. 가끔 쓸데없는 대화를 하면서 독신자숙소에서 딱새우를 쪄 먹은 기억이 난다. 한국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심통이 났다. 리안이며 패트릿이며 발칸 반도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나이가 많았음에도 반말로 그들에 대한 글을 써 온 주제에 한국인이라는 것만으로 어미가 달라져야 했다. 귀찮아졌다. 해영은 군대에서 만난 몇 안 되는 좋은 친구였다.
‘알바니아 화생방지원대입니다’ 사진 밑에 한 줄을 더 보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보낸 김에 새해 복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