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되었다
정식 출간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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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은 떠나는 곳이고 도착하는 곳이었다. 기다리는 곳도 될 수 있다는 것은 오늘 처음 알았다. 아테네 국제공항에서 친구인 현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것은 순수하게 재미없는 일이다. 따분하고 지루하기만 하다. 가끔 누군가와 이별을 해야 할 시점이 도래한다고 느낄 때는 일부러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은 일찍 도착하곤 했다. 얼굴을 보았을 때 기다림의 지겨움이 깨끗이 씻겨져 나간다면 이별을 미뤄두어야 했다. 잴 수 없는 감정을 굳이 수치화하려고 하는 사람은 늘 피곤하게 산다.
예정 시간보다 현석이 늦게 나와 기차를 취소해야 했다. 정시에 내리긴 했는데 화장실에서 똥을 싸느라 늦었다고 했다. 당당하게 똥을 쌌다고 하니 어째 초등학교 선생님다운 답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본 친구에게 주먹을 날리고 함께 택시를 탔다. 점점 올라가는 미터기의 요금을 보고 더럽게 비싼 똥 쌌다며 핀잔을 날렸다. 하지만 다음 기차를 타려면 선택은 택시를 타는 것뿐이었다. 기차역에 도착해서도 시간은 모자랐다. 캐리어를 던지다시피 하며 달렸다. 늦은 줄 알았던 기차는 가만히 서 있었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우리를 비웃듯이 사람들이 천천히 기차에 탔다. 기차는 결국 예상시간보다 10분은 늦게 출발했다.
기차는 ‘메테오라’라는 곳으로 이동했다. 절벽 위에 있는 수도원들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리스 한가운데쯤 있는 곳이라 한숨을 자고 일어나도 기차는 달리고 있었다. 현석과 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대화를 하지 않아도 크게 불편할 것이 없는 사이다. 차창을 바라보다가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한국에서 제야의 종을 울릴 시간이었다. 그리스 어딘가 철도 위에서 나는 결국 서른이 되었다. 서른이 된 기념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서른이면 분명히 어른이어야 했는데 나는 아직도 어떤 과거에 닻을 내리고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려서부터 서른이 되는 시점은 멋질 거라고 생각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믿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어떤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결혼을 해서 아이 키우는 고민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일에 치여 피곤하게 살지만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인정받는 삶을 살 것 같았다. 취미로 글을 써서 책을 몇 권 내고 하루를 위스키 한 잔으로 마무리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상상은 깨어질 때 아름다운 법이다. 깨어진 파편 중에 단 하나도 갖고 있지 못한 나는 기차에 몸을 싣고 속으로 욕이나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점심시간에 노래를 틀어주었다. 여러 노래가 있었지만 강하게 뇌 한편에 남아있는 것은 '나이 서른에 우린'이라는 노래다.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 어느 곳에 어떤 얼굴로 서 있을까."
"나이 서른에 우린 무엇을 사랑하게 될까. 젊은 날의 높은 꿈이 부끄럽진 않을까."
중학교 때 친구였던 지훈의 생각이 났다. 지훈은 공고에 갔고 차를 고친다. 내 차도 고쳐준 적이 있다. 중고차를 사고 난 다음 날에 지하주차장 기둥에 들이박아 차가 찌그러진 곳이 있다. 지훈은 나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이름도 모를 장비를 가져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차는 금세 새것이 되었다. 지훈은 일찍 결혼했고 그를 닮은 아이도 둘이나 있다.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갔고 대학을 나와 대학원까지 졸업했다. 공들여 논문을 썼지만 차를 고치지도 못하고 그에 준하는 정도로 실용적이지도 않다. 나는 결혼은 고사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도 잘 못 걸고 끙끙대고 있었다. 스물 초반 즈음에는 내가 어른이고 지훈이 아이 같았다. 지금 와서는 딱 반대다. 나는 가끔 젊은 날의 높은 꿈을 아직도 꾸고 있는 나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지훈은 그럴 때면 멍청한 소리 좀 하지 말라고 한다.
서른이 된 한국인 둘은 ‘메테오라’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돌덩이가 눈앞에 있었다. 그것을 돌덩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돌덩이는 산보다 컸다. 돌덩이 위에는 작은 집들이 있었다. 확실히 걸어서 돌아다닐만한 곳은 아니었다. 미리 예약해 둔 ‘홀리 락 호스텔’까지 걸어갔다. 호스텔 이름이 특이하다 싶었는데 거리를 걸으며 본 산만한 돌덩이들을 보며 이해가 갔다. 저 돌로 된 산은 성스럽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것들이었다. 저런 곳을 걸어 올라가려고 했던 미련한 스스로를 반성하며 투어를 찾았다. 새해 첫날이라 투어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영업하는 곳이 더 많았다. 작은 버스를 타고 절벽 위에 있는 수도원을 몇 군데 들리는 코스였다. 아테네에서 만난 베어가 말한 대로 그리스인의 자본주의는 투철했다. 카드 결제를 하고 잠에 들었다.
졸린 눈을 비비고 버스에 올랐다. 검은 개 한 마리가 널브러져 자고 있는 카페에서 미리 음료수와 과자를 샀다. 그리스의 새해 첫날은 그렇게 시작했다. 한국인은커녕 동양인이 없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메테오라를 둘러싸고 있는 돌덩어리 위에는 많은 수도원이 있다. ‘성 니콜라스’니 ‘성 삼위일체’ ‘성 스테판’이니 하는 이름들로 되어 있는데 어떤 곳은 다리가 있어 들어가 볼 수 있고 어떤 곳은 정말 멀리서 바라만 볼 수밖에 없게 되어있다. 뜬금없이 솟아있는 돌덩이 위에 다리도 없는 수도원을 보고 있자면 어딘가 성스러운 기분이 든다. 저기 사는 수도사들은 심심하지 않을까 싶었다.
버스는 들어갈 수 있는 수도원 근처에 멈췄다. 이름은 각기 달랐지만 내부는 비슷했다.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이 다 그곳이 그곳이기 마련이다. 기도하는 곳과 수도사들이 지내는 곳이 있었다. 여행자들은 성호를 그리며 동상이며 그림에 입을 맞췄다. 코로나 옮기기 딱 좋을 것 같다는 불경한 생각을 했다. 수도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조각이나 그림이나 옷 같은 것을 구경했다. 가장 재밌는 것은 십자가였다. 조각들마다 십자가 생김새가 달랐다. 어떤 종교적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른 십자가를 찾는 재미에 빠져 돌아다녔다. 수도원마다 있는 기념품 매점에는 종교 물품 외에도 올리브 오일을 팔았다. 그리스 답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였으면 참기름이나 들기름일 터였다.
수도원 안에서 보는 밖의 돌산들은 다른 매력이 있었다. 어째 지구 같다는 생각보다는 화성 아니면 목성 같다는 느낌이었다. 목성은 가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니 아무래도 화성이겠다. 미세먼지 하나 없는 하늘빛 하늘 아래로 먹먹한 안개가 깔려 있었다. 그 안개 사이사이로 돌 산들이 하나하나 불규칙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스 신화가 태동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무리 삭막한 사람이라도 이런 곳에 몇 년을 살다 보면 그런 신화적인 이야기정도는 몇 편을 써내려 갈 수밖에 없다.
그런 장엄한 배경을 앞두고 굉장히 귀찮은 일이 계속됐다. 현석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면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사진 찍는 것도 찍히는 것도 귀찮아하는 인간이지만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하기 싫은 것도 막상 하기 시작하면 잘 해내야만 하는 귀찮은 성격을 갖고 있다. 둘이 같이 찍은 사진도 몇 장 있다. 같은 버스에 타고 있던 이탈리아 커플에게 부탁했다.
투어가 끝나고 우리는 이탈리아 커플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활발한 사람들을 만나니 오랜만에 기가 빨렸다. 메뉴판을 보며 고심하고 있자 남자는 파스타 위에 치즈를 덮었다는 음식을 추천해 줬다. 파스타가 아니고 웬 치즈 벽돌이 나왔다. 치즈 벽돌을 먹으면서 이탈리아 어디를 여행하면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심지어 아테네로 향하는 기차도 함께 탔다. 숙소에 들어서니 음식의 이름도 커플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