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도망친 러시아인
정식 출간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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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 소리와 함께 착륙한다는 방송이 나왔다. 내려가는 기분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비행을 해야 할 때면 착륙을 조금 더 급박하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려가는 것이 좋다. 항공기는 이륙하여 위로 올라가고 착륙하며 아래로 내려간다. 올라가는 것은 별다른 감흥이 없지만 하강할 때는 홍조가 든다. 자이로드롭이나 행글라이더를 탈 때도 그렇다. 내려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어쩌면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온갖 기를 쓰고 높이 오르는 것보다 정상 즈음에서 추락하는 것이 더 흥분될지 모른다. 저마다 다른 정상의 높이를 서로 모르는 것이 문제다. 낮은 곳에서 멈춰버리면 충분히 활강할 수 없다. 더 높은 곳만 바라보다가는 뛰어내릴 수 없다.
내리는 모든 것을 좋아한다. 비도 그렇고 커피도 그렇고 석양도 그렇다. 하강하는 모든 것들은 슬프고 또 따뜻하다. 그런 무덤덤한 추락을 보고 있자면 편안해진다. 살다 보면 편지를 써야 할 때가 있다. 긴 글은커녕 긴 영상마저도 외면받는 시대다. 30초도 되지 않는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그램 릴스를 보며 하루 24시간을 채운다. 그런 세상에서 편지를 적는 것은 어련히 수치스러운 과정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편지가 취미인 낡은 인간이다. 예전엔 온갖 변명을 해 가며 편지를 보냈다. 사실은 내가 편지를 쓰고 싶을 뿐이었다. 심지어 편지를 쓰고 싶어 시작한 연애도 있었다.
편지 서두에는 글을 내린다는 표현을 쓴다. 글을 쓰다라거나 글을 적다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쓴 것은 입이 텁텁해지고 적은 것은 영 부족해진다. 대신 글을 내린다. 종이 한 장에 글자들을 줄지어 내린다. 하강하는 글자들을 바라보면 행복해진다. 다만 요즘은 누군가에게 보낼 글을 내리고 봉투에 가지런히 담은 후에 찢어버린다. 글이 부담스러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편지는 더욱 소화하기 어려운 것이다. 보내야 하는 주소를 잃은 지도 오래다.
옷을 몇 겹 벗어야 했다. 위도가 얼마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체감되는 온도는 확 달라졌다. 그리스의 겨울은 더운 곳이었다. 항공기에서 내려 기차로 갈아탔다. 미적분학 책에서나 보았던 그리스 문자들로 된 이정표와 눈싸움을 했다. 호스텔 근처에 있는 역에 겨우 내릴 수 있었다. 눈을 의심했다. 한 겨울에 귤인지 오렌지인지가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귤이라기엔 컸고 오렌지라기엔 조금 작아 아기 오렌지라는 이름을 멋대로 붙였다. 거리에서 과일 향기가 났다. 서울 거리를 가득 채운 은행나무처럼 아테네 거리에는 아기 오렌지나무가 널려 있었다.
캐리어를 끌고 배낭을 메고 거리를 걸었다. 집들이 많았다. 묘하게 딱딱하고 차가웠던 이전 나라들의 집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외투를 벗으며 무엇이 다른지 곰곰이 생각했다. 발코니가 있었다. 확실히 못 보던 것이었다. 모든 곳에 발코니가 있었고 그 발코니에는 유리창이 없었다. 대신 커피 한 잔 하기에 딱 좋을 것 같은 의자와 온갖 식물들이 있었다. 실제로 지나다니면서 올려다본 그리스 사람들은 그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포근하고 나른했다. 이런 날씨를 조금만 더 겪는다면 일이라는 것을 영영 하기 싫을 것 같았다. 찬란했던 그리스 문명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다. 이 햇볕을 마주한다면 귀족도 노예도 아무런 생각 없이 낮잠이나 잤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 없이 살 수 있어서 문명을 이루어냈을지도 모르겠다.
호스텔을 찾기 위해 같은 건물을 적어도 다섯 번 돌았다. 분명히 구글 지도에 위치한 곳으로 왔지만 숙박 업소처럼 보이는 곳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날은 금세 어두워졌다. 길을 잃은 표정으로 멍청하게 서 있으면서 도움을 바라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배터리가 부족해 저전력 모드로 변경한 핸드폰처럼 기운이 없었다.
건물에 있는 오토바이 수리점으로 들어갔다. 나이가 진득한 할아버지를 마주했다. 할아버지는 영어를 하지 못했고 나는 그리스어를 하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떠오르는 것을 실시간으로 봤다. 할아버지는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니 의자에 잠깐 앉으라는 몸짓을 했다. 영문도 모르고 앉아 있으니 할머니 한 분이 오셨다. 할머니 덕분에 길을 찾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옆 건물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계셨다. 고마운 마음에 사과 몇 개를 샀다. 오토바이는 살 수가 없어서 할아버지께 사과 두 개를 드렸다. 한 개는 정이 없는 법이다.
정신없이 체크인을 하고 다인실에 들어섰다. 문을 열자마자 나체의 남자와 마주쳐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아래쪽을 바라볼 수는 없으니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타이밍이 좋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얼굴은 대화에 굶주린 얼굴이었다. 그는 팬티를 입고 나는 배낭을 풀며 통성명을 했다. 반팔을 입은 그는 내 이름을 발음하지 못했고 나도 그의 이름을 발음하지 못했다. 마침내 반바지를 입은 그의 옷에는 곰이 그려져 있었고 내 옷에는 호랑이가 그려져 있었다. ‘베어’는 러시아에서 왔고 ‘타이거’는 한국에서 왔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벌이는 중에 젊은 청년이 그리스 저가 호스텔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나는 전쟁이 싫어. 타이거. 도망 다니면서 망명 신청을 하고 있는데 잘 안 되네.” 옷을 다 입은 베어가 말했다.
“괜찮은 거야? 군인들이 잡으러 오지는 않아?” 내가 말했다.
“아직까지는 아니야. 나도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어. 심지어 내가 러시아인이라고 하면 모두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봐.” 베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베어의 영어 발음은 상당히 독특해서 의사소통을 하려면 몇 번을 되물어봐야 했다. 그는 그리스로 도망쳐 이 싸구려 호스텔에 삼 주 정도 있었다고 했다. 하긴 그의 침대는 여행자의 모양새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맥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딱 신림동 어디 자취방에 있을 법한 모양새였다. 무언가를 구경하러 온 것도 아니었고 돈을 벌러 온 것도 아니었다. 도망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이유 없는 동질감이 들었다. 원인과 맥락이야 다르지만 나도 결국 한국에서 도망친 처지였다.
많이 피곤했지만 의자에 걸터앉아 베어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 러시아를 횡단한 경험이 있어 대화할 이야기는 부족하지 않았다. 아니 부족하다고 느끼더라도 베어는 온갖 대화 주제를 가져와 내게 토해냈다. 바이칼 호의 아름다운 적막과 러시아 정부 놈들의 멍청함과 시베리아의 살벌한 추위와 전쟁의 무서움에 대해 말했다.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핸드폰 충전기가 고장 난 것 같다며 그리스 놈들의 자본주의에 대한 욕이 시작될 때쯤 여분의 핸드폰 충전기를 하나 건넸다.
“타이거. 너는 최고의 사람이야. 이거 진짜 내가 가져도 되는 거야?” 베어가 얼굴이 벌게져서 물었다.
“응. 난 하나 더 있어. 베어? 우는 거야?” 당황한 내가 되물었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단 말이야.” 눈시울이 붉어진 베어가 말했다.
아무래도 러시아 사람이었던 베어는 제대로 울지는 못했고 화장실로 달려가 콧물을 세게 풀었다. 베어는 자기는 줄게 없다며 횡설수설하며 방을 가로지르다가 내게 파스타를 먹겠냐고 물었다. 호스텔 로비에는 간단하게 요리를 할 수 있는 주방이 있었다. 베어는 팔팔 끓는 물에 소금도 없이 면을 넣고 끓였다. 토마토소스 병은 거의 비어 있었다. 베어는 면을 소스 병에 집어넣더니 칵테일을 섞는 것처럼 소스 병을 흔들었다. 소스가 많지 않아 영 심심한 맛이었지만 그런대로 맛은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