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거리가 많고 먹거리가 비싸요
정식 출간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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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나라의 호스텔에도 로비는 있다. 체크인을 위한 데스크 외에도 간단하게 요리를 하는 곳이나 쉴만한 장소가 제공되고는 한다. 호텔이나 에어비엔비와는 다른 이 어떤 무기력한 공간이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이 기묘한 공간을 좋아한다. 그래서 호스텔을 찾을 때는 로비가 사랑스러운 곳을 찾는 데 공을 들이고는 한다. 내가 자연스럽게 널브러져 있어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곳으로 말이다.
그곳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눈이 마주쳤을 때 인사하면 된다. 서로에게서 아무것도 알 방도가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친구가 된다. 물론 보통의 인생처럼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더 크다. 그러니 부리나케 눈을 마주쳐야 한다.
며칠 전 호스텔에서 눈을 마주친 건 하루나라는 일본 사람이었다. 그녀는 마치 일본 영화에 나올 것 같은 색채로 의자에 앉아 하품을 하고 있었다. 가끔 그런 명확하지 않은 색감을 가진 사람이 있다. 오버사이즈 파스텔톤 티셔츠를 세 번 정도 빨아 물이 빠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 나른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은 싫어하기 어렵다. 우리는 ‘그리스에는 왜 오셨어요’로 시작하는 여행자 공식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아테네는 오래 있으면 안 되는 도시야.” 하루나가 말했다.
“왜? 날씨도 좋고 볼 것도 많던 것 같은데.” 내가 물었다.
“첫날에는 정말 고대 도시에 들어온 것 같아서 너무 아름다웠어. 사람들이 왜 아테네에 환장하는지 알겠더라니까. 동화 속에 사는 것 같았어.” 하루나가 말했다.
“근데 두 번째 날이 되니까 어제 본 게 오늘 본 거랑 비슷한 것 같은 거야. 구글 지도를 켜고 하루 종일 열심히 다녔는데 허무했어.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건지긴 했지만.” 하루나가 계속 이어 말했다.
“너 여기 일주일 넘게 있었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말했다.
“맞아. 세 번째 날부터는 그 모든 화려한 신전들이 그냥 다 똑같은 돌덩이로 보여. 알잖아. 남자는 다 그놈이 그놈인 거랑 똑같아.” 하루나가 무기력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첫 아테네 여행은 화려했다. 현석은 하루하루 계획을 짜서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다. 여러 가지 검색을 하더니 ‘아테네에서 꼭 보아야 할 것 10선’ 같은 느낌의 리스트를 보여줬다. 현석이 오기 전까지 호스텔 로비에서 아기 오렌지나 까먹으면서 낮잠이나 자던 나였지만 그 리스트를 보니 움직일 마음이 동했다. 많은 유적지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이동하기는 편할 것 같았다.
‘아고라’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광장이지만 어째 예전에 ‘다음’에서 서비스했던 토론 커뮤니티가 더 먼저 떠올랐다. 작은 캡쳐본만 보아도 피곤해졌던 그 커뮤니티의 다양한 의견들처럼 ‘아고라’는 거대했다. 조금만 걸어도 어떤 신전 대들보로 썼을 것 같은 돌덩이가 나왔다. 눈을 옆으로 돌리면 그리스에 없었다면 박물관 한 자리정도는 차지할 법 한 조각들이 나왔다. 한 덩이만 주워가도 역사적 사료로 참 많은 것을 밝혀낼 수 있을 것 같은 예술품들이 이곳저곳에 덩그러니 쌓여 놓여있었다. 그리스 다웠다.
박물관을 걷다 보니 중학교 미술실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학교 데생 수업 때는 정말 특출 난 몇 명을 빼놓고는 아그리파인가 뭔가 하는 조각상을 그릴 권한이 없었다. 미술실에는 아그리파 말고도 무섭게 생긴 조각들이 많았다. 아무도 그리지 않았던 그 조각상들은 한 군데에 모아져 누워 있기만 했다. 물론 조각상은커녕 직육면체 하나에도 쩔쩔매는 나는 상관이 없었던 일이었다.
수많은 예술 작품을 뚫고 나가면 신전이 몇 개 있었다. 그야말로 그림책에서나 보던 그리스 신전이 있었다. 하얀 돌기둥을 세워 그 위에 높은 지붕을 올리고 조각을 새겼다. 신전에 압도당하는 기분은 생소했다. 세계 어디를 가든 더 크고 성스러운 건물도 많았지만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색깔이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색이 바랬는지 원체 이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같은 색으로 된 돌덩이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목을 꺾어 신전의 조각을 올려다보면서 그리스 신은 심심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점심 즈음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오는 사람들 고민이나 좀 듣다가 옆 집 다른 신이 나 만나면 될 것 같았다. 이 날씨 좋은 땅에 사는 사람들이 심각한 고민을 들고 올 것 같지도 않았다. 햇볕 쬐기엔 최고의 온도 밑에서 사람들은 신전 근처에 기어 다니는 거북이나 고양이를 졸졸 쫓아다니고 있었다. 고양이야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지만 거북이가 도심을 기어 다니는 모습은 꽤 이국적이었다. 거북이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사람들과 함께 행진했다.
더 이국적인 것은 밥값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이 정도 밥값이면 하루에 대여섯 끼는 먹어도 되겠다’ 싶은 곳을 방황해서인지 충격은 더 컸다. 보통 한국에서 먹는 식사보다 꽤 비싼 가격이 영수증에 기록되어 있었다. 비싼 식사와 멋진 볼거리를 뒤로하니 어째 내가 살아왔던 날들은 여행이 아니라 생존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숙소에 갈 때는 마트에서 파스타 면과 마늘 조금을 샀다. 그리스산 올리브유에 마늘을 볶아 삶은 파스타 면과 휘적거렸다. 알리오 올리오는 그 어떤 곳에서든 생존에 필수적인 레시피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