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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테네 (3)

운수 좋은 날

by 석지호

정식 출간 예정입니다 !

https://tumblbug.com/balkantravel


바지가 찢어졌다. 호쾌하게도 일직선을 가르며 정말 바지가 반쪽이 났다. 성격이 급해 신전 계단을 세 칸씩 오르고 있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하여튼 다리가 짧으면 그냥 그대로 만족하고 살아야 한다. 굳이 남들보다 빨리 가겠다고 다리를 뻗다 보면 이런 불상사가 난다. 아끼는 바지는 아니었지만 아낄 수밖에 없는 바지였다. 캐리어에 있는 바지라고는 찢어진 이 바지를 합쳐서 두 벌뿐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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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그야말로 ‘운수 좋은 날’이었는데, 검은 후드 티 하나도 버려야 할 판이었다. 알바니아에 있을 때 호텔 빨래 서비스를 이용했었다. 몸도 안 좋고 정신도 없어서 뭐 별 거 없겠거니 하고 옷을 수령을 했었는데 그 안일함이 문제였다. 알바니아 표백제는 다른 나라보다 세네 배는 강력한지 후드 곳곳의 색깔이 변해있었다. 어떻게 보면 점박이 같아서 나름 홍대 어딘가를 걸으면 있을 것 같아서 괜찮을까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몇 군데가 찢어져 있었다.


평소에도 옷을 사는 것을 그렇게 즐기지는 않는다. 그래도 어느 정도 깔끔하게 입고 다닌다고 생각을 하지만 늘 예전 사진들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분명히 그때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지금 와서 보면 어떻게 이런 옷을 걸치고 다녔나 싶다. 옛날이라고 해봐야 몇 년 되지도 않은 사진들을 볼 때면 시간의 흐름이 체감이 된다. 가끔 그 옷이 자연스러웠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 그런 옷을 입고 만났던 사람들이 보고 싶다.


‘모나스티라키 벼룩시장’으로 향했다. 분명히 네이버 어떤 글에 나왔던 설명은 골동품 가게나 기념품 가게가 많아 구경하기 좋다고 했었다.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온 건 굳건히 닫힌 문들 뿐이었다. 코로나의 영향인지 휴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넓은 시장터가 전부 닫혀 있었다. 한 블록 옆으로 가니 열려있는 시장이 있었다. 고기와 생선을 파는 곳이었다. 시장은 늘 활기찬 곳이지만 육류를 파는 곳은 더 생명력이 넘친다. 칼인지 도끼인지 구분도 안 되는 날붙이로 고기를 해체한다. 언제든 탈출할 것 같은 모습의 생선이 얼음 안에 파묻혀 있다. 생명이 사라지는 곳에서 가장 큰 생명력을 느끼는 것은 여실히 모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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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안에 생선구이를 하는 곳이 있었다. 냄새가 기가 막히기도 했고 한동안 내륙지방에만 있던 탓에 생선이 먹고 싶었지만 줄이 꽉 차 있어서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사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다음을 말하는 것이 참 무의미한대도 관성적으로 그렇게 한다. 살면서 그리스를 다시 올 수 있을까. 오더라도 굳이 이 벼룩시장을 찾아오기는 할까. 전에 인연이 닿았던 사람과 실랑이를 한 적이 있었다. 학생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운 가격의 꽃다발 앞에서였다. 나는 당신에게 꼭 어울리니 사주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녀는 시간도 없고 돈도 없으니 나중에 오자는 말을 했다. 결국 다음에 들려 사자는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운이 좋게도 벼룩시장 앞에 몇 매대에서 옷을 팔고 있었다. 한국에서라면 절대 입을 것 같지 않은 갈색 셔츠와 쑥색 카고바지를 하나 샀다. 둘 다 살짝 내 몸에는 커서 접어 입어야 했다. 영 촌스러운 스타일이 이었지만 지금 기회를 놓치면 어디서 옷을 살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가격도 크게 비싸지는 않았다. 계산을 하고 나니 아주머니가 따봉을 날렸다. 나는 두 손을 들어 쌍 따봉을 날렸다.


그 옷을 입고 파르테논 신전에 올랐다. 파르테논은 유적지가 즐비한 아테네에서도 딱 중심부 정도에 위치한다. 다른 지역보다 고도가 높아서 어디서나 대충 저기쯤 파르테논 신전이 있겠거니 할 수 있는 위치다.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날씨가 더워 땀을 뻘뻘 흘리며 파르테논 신전을 보러 갔다. 사실 지나다니며 본 누구네 신전이나 누구네 건축물이라는 것이 점점 비슷해져 보이는 때였다. 파르테논 신전은 조금 달랐다. 크고, 멋지고, 아름다웠다. 그 대단한 건물에 붙이는 수식어 치고는 투박하지만 그 단어들 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정말 크고, 멋지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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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의 엠블럼이 파르테논 신전을 모델로 한 이유가 있었다. 작은 인간은 지금으로부터 이천 년 전에 세워진 건물 앞에서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어렸을 때 이 건물을 직접 봤다면 아마 건축학과를 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어렸을 때 뭔가를 잘 봐야 한다. 동물농장이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황우석 뉴스만 보던 초등학생은 결국 생명공학과에 가버리고 말았다. 여하튼 미생물 밥이나 챙기는 것이 일인 나 조차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세월의 흔적에 의해 부서진 부분조차 아름다웠다. 그리스에서 신은 있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파르테논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도 여러 건축물이 있었다. 하지만 전혀 아무런 감흥도 없어졌다. 그 정도로 파르테논 신전은 기억에 남았다. 전에 호스텔에서 만난 하루나가 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아마도 하루나는 첫 번째 날에 파르테논 신전을 보고 말아 버린 것이 분명했다. 하루나의 말처럼 나는 아테네 여기저기 펼쳐져 있는 고대 건축물이 그저 돌덩이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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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와 옷을 벗으니 종아리가 쑥색으로 염색되어 있었다. 비를 맞은 것도 아닌데 바지 염색이 빠져버린 것이었다. 아주머니가 날린 따봉은 ‘이 옷 좋으니 잘 입어요! 고마워요!’의 의미가 아니었다. 아마도 ‘나도 안 입을만할 옷을 입네! 호구라서 고마워요!’ 였을 것이다. 화가 나서 샤워를 박박 했다. 종아리에 묻은 색깔은 잘 지워지지도 않았다. 피부에서는 지워지지 않고 옷감에서는 지워지는 염료라니 그야말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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