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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테네 (5)

죽고 살고 배를 타고

by 석지호

정식 출간 예정입니다 !

https://tumblbug.com/balkantravel


느지막하게 일어났다. 한국에서 바삐 살던 버릇은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여행을 오래 다닐 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게으름이 좋다. 짧은 여행은 어쩐지 조바심이 든다. 삶에서 방학이 사라져 버리고 나면 긴 여행을 다니기는 어려운 일이다. 강제로 방학해 버린 내 지금 삶이 갑자기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이 방학이 끝나고 나면 한동안 여행을 다닐 시간을 낼 수 없거나 가더라도 이렇게 멍청하고 부질없는 하루를 보낼 여유는 없을 것이었다.


현석은 미리 나가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구글 지도를 보니 마침 근처에 ‘기념 묘지’라는 곳이 있어 거기서 만나기로 했다. 그곳에는 당연히 묘지가 많았다. 여러 생김새의 묘지를 구경하면서 시간을 때우려고 했는데 의도치 않은 변수가 하나 있었다. 오래된 묘지가 존재하는 것 외에도 실제로 장례를 치르는 곳이었다. 사제로 보이는 사람이 앞장섰고 검은 양복을 든 사람들이 관을 들고 뒤따랐다. 우는 사람도 없고 웃는 사람도 없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앞에 둔 사람들을 보며 이곳은 우리가 구경할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자리를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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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일이다. 어떻게 보면 종묘도 죽은 사람들을 모신 곳이고 타지마할도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삶의 덧없음을 아름다움으로 칠한 곳은 별다른 부담감 없이 구경하지만 어째 실제 죽음을 목도하면 그것보다 마음이 무거워질 수가 없다. 이럴 때면 어떠한 정신적 자유를 느낀다. 나도 죽겠구나. 언젠가는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겠구나. 예정된 완벽한 망각은 죽음을 오히려 덤덤하게 생각하게 한다.


새벽안개 같은 마음을 지우기 위해 조금 생동적인 것을 보러 가고 싶었다.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은 기원전에 건설된 대리석 경기장이다. 달리기를 위한 트랙과 여러 운동 경기를 했을 법 한 공간을 대리석이 조개처럼 감싸고 있다. 경기장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보니 기원전이라는 말의 무게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그리스에 오기 전 기원전은 정말 까마득히 오래전이라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술 먹고 잘 기억 안나는 어제 같은 느낌이다. 그만큼 기원전에 세워졌다는 건물들이 말도 안 되게 깔끔하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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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기장에서 뛰었을 사람들의 후손들은 아직도 경기장에서 운동하고 있었다. 체육 선생님을 졸졸 따라다니는 꼬마들이 장애물 달리기나 핸드볼을 연습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전부 트랙 위에서 폼을 잡고 짧은 달리기를 했다. 나는 달리기를 하기에는 너무 귀찮고 더워서 관람석 위에 걸터앉아 해풍 맞는 어포 마냥 멍하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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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있는 박물관에는 역대 올림픽 포스터들이 전부 전시되어 있었다. 1988년도 서울 올림픽 포스터도 있었는데 캐리어에 넣으면 구겨질 게 분명해서 사진 않았다. 내게 88 올림픽은 약간 어른을 나누는 경계선 같은 기분이었다. 어렸을 때 나이 찬 어른들은 내게 그럼 88 올림픽도 못 봤겠다는 농을 던졌다. 지금은 어째 내가 나이 찬 어른이 되어버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군대에 온 신병에게 그럼 2002 월드컵도 못 봤겠다는 말을 했다. 오래된 농담을 답습할 때 비로소 나이가 차긴 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스는 돌이었다. 그리스라는 나라를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돌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것이 어떠한 편견의 편린일지라도 나라에 대해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생겼으면 바로 그때가 다른 나라로 이동할 시기다. 그런 개똥 같은 철학을 가지고 있다. 불가리아는 그라피티, 마케도니아의 동상, 알바니아의 벙커처럼 그리스는 돌이었다. 복잡하고 다양한 발칸 반도 역사를 뒤로하고 세워진 나라들은 멍청한 동양인 한 명에 의해 한 단어로 요약되고 말았다.


배를 타야 했다. 사실 비행기를 타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인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배를 타야 했다. 배를 타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래도 멋있기 때문이다. 승선 티켓을 구매할 때 현석을 설득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내 마음대로 했다는 뜻이다. 그리스에서 출발하는 야간 페리를 타고 터키로 넘어가 새벽에 작은 배로 갈아타는 여정이었다. 야간 페리라는 단어는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야간도 낭만적이고 페리는 더 낭만적이다. 당연히 야간 페리보다 낭만적인 단어는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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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을 뻘뻘 흘리고 졸음을 참으며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배를 탔다. 4인 1실을 예약했는데 내 상상보다 훨씬 숙소는 괜찮았다. 일반 호스텔 4인실과 비슷한 느낌에 심지어 샤워실도 있었다. 당연히 물이 안 나오겠거니 하고 돌린 샤워기에서는 심지어 따뜻한 물이 나왔다. 돈을 내면 바다 한가운데에서 인터넷도 사용할 수 있었다. 세상과의 단절을 선호하는 나는 당연히 돈을 내지 않았지만 현석은 돈을 냈다. 그리고 새벽에 몇 번을 깨서 일을 했다. 자기 반 학생들의 중학교 배정에 대한 것이었다. 야간 페리에서의 새벽 노동이라니. 낭만의 치사량에 도달한 기분이었다. 물론 나는 야간 페리에서의 숙면을 택했다.


혼자 설레서 배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다녔다. 술을 파는 바도 있었고 간단한 음식을 판매하는 식당도 있었지만 남들 먹는 것을 보니 영 퀄리티가 저조했다.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딜러가 있는 카지노나 휘황찬란한 연회는 없었지만 배라는 것은 늘 어른을 소년에 가깝게 만들어주는 곳이다. 갑판 근처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밤바다여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짠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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