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에 반하다
정식 출간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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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연착됐다. 항구 앞에 유일하게 연 식당이 있어 커피를 시켜 놓고 바다를 바라봤다. 새벽 어딘가에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맨 정신으로 일출을 바라본 것이 몇 년 만인지 알 수 없었다. 검정은 보라색과 남색으로 바뀌더니 결국 하늘색이 되어 제자리를 찾아갔다. 페리의 반의 반도 안 되는 크기의 통통배를 타고 ‘체스메’로 향했다. 원래는 ‘체스메’에서 바로 버스를 타고 ‘이즈미르’라는 대도시로 갈 예정이었지만 낡아버린 몸 때문에 쉬어가기로 했다.
아무런 정보도 없고 아무런 기대도 없던 곳에 반해버리는 일은 흔치 않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어떤 것을 좋아하는 것에 시간이 꽤 걸리는 나 같은 인간은 더욱 그렇다. ‘첫눈에 반하다’라는 감정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꼭 그 감정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체스메라는 도시에 첫눈에 반해버렸다. 바다가 맑았다. 속을 다 내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곳저곳에 작은 배들이 쉬고 있었고 그 앞에는 꼭 개 한 마리가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생선 냄새가 나는 곳엔 꼭 고양이 몇 마리가 서성이고 있었고 어부는 자투리 생선을 던져 줬다. 이 아름다운 곳의 완성은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혼자 바닷길을 걸었다. 물만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오래된 천성이다. 여분의 양말이나 수건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음에도 굳이 바다에 발을 담그는 습관도 여전했다. 맨발로 참방참방 걸었다. 한참을 걸어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끝자락에 도착해서야 낚시하는 남자들과 물장구치는 아이들이 보였다. 아이들은 머뭇거리더니 내게 대화를 시도했다. 번역기는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꺼내지 않는 게 철칙이지만 아이들과 대화하고 싶어 번역기를 켰다.
“어떤 나라에서 왔어요?” 빨간 옷 꼬마의 질문이었다.
“코리아. 코리아. 한국에서 왔어요.” 내가 대답했다.
“여기는 왜 왔어요?” 빨간 옷 꼬마 뒤에 숨어있는 노란 옷 아이가 물었다.
다시 마주한 어려운 질문에 대답을 잃었다.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맛있는 것도 먹고 수영도 하고 놀려고 왔다는 말을 했다. 아이들은 고맙게도 이방인을 위해 튀르키예 음식을 추천해 줬다. 번역기 성능이 영 좋지 못했는지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지막 말은 확실하게 이해했다.
“어제 저기서 생선구이를 먹었는데 엄청 맛있었어요!” 빨간 옷 꼬마의 외침이었다.
대체 저기가 어디인진 모르겠지만 생선구이는 꼭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양념 하나 없이 구운 고기와 감자튀김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꼬마들과 잠깐 물장구를 치다가 숙소에 들어가 낮잠을 잤다. 노를 저은 것도 아닌데 배를 타는 것은 피곤했다. 아마도 나는 전생에 거북선 조타수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잠을 푹 자고 나서 ‘이즈미르’로 향하는 버스를 찾으러 갔다. 구글을 뒤져봐도 버스 정류장 정보는커녕 체스메 여행 후기도 없었기에 미리 확인을 해야만 했다. 모르는 언어에 둘러싸이는 기분은 언제나 흥미롭다. 특히 나이 든 사람들이 말하는 모르는 언어는 더 재밌다. 간이 버스 정류장에서 축 쳐져 있는 할아버지들은 튀르키예어로 무언가를 열심히 말했다. 당연히 나는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고 몇 번의 바디랭귀지 끝에 표 가격과 출발 시간을 알 수 있었다. ‘이즈미르’로 언제 가냐는 질문을 ‘이즈미르!’만 외치면서 부우웅 소리를 내며 버스 흉내를 냈다. 할아버지는 열심히 말을 하더니 포기하고 지폐를 세서 보여주고 시계를 돌려 알려줬다. 완벽한 대화였다.
숙소로 향하는 길에 ‘체스메 성’이 있어 들렸다. 튀르키예 서쪽 바다를 지키는 첫 요새 같았다. 여기저기에 대포가 널려 있어 괜히 신이 났다. 나이 서른 먹고 대포 옆에 서서 쏘는 시늉을 했다.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어째 강화도가 생각이 났다. 강화도에도 초지진이니 덕진진이니 하는 작은 진이 있다. 그곳이나 이곳이나 성벽에 턱을 괴고 바다를 바라보면 아름답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그 옛날의 누군가는 저 바다를 가득 채운 적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상상했다. 하지만 그런 슬픔을 상상하기엔 너무 바다가 아름다웠다.
아이들이 알려준 대로 생선구이를 주문했다. 종업원은 두 가지 종류의 생선 이름을 말해주며 그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홍채에 물음표를 몇 번 띄우자 종업원은 내게 잠깐 나오라고 했다. 생선 이름 모른다고 한 대 때리려나 싶었는데 문 앞에 있는 생선들을 보여줬다. 대체 생선 얼굴만 보고 뭐가 맛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느낌 가는 대로 골랐다. 선택은 완벽했고 오랜만에 마주한 생선에 여지없이 만족했다.
생선구이를 안주로 맥주를 비울 동안 고양이 한 마리가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턱시도를 입은 것처럼 검은색과 하얀색 털의 고양이였다. 울면서 달라는 것도 아니고 계속 째려보고 있길래 사진을 찍었다. 고양이가 귀여워 살점을 좀 던져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생선구이가 맛있었다. 감자튀김이 아니라 웨지감자인 것도 감격스러운 것 중에 하나였다. 그리스 음식에 지쳐버렸던 나는 바로 행복해졌다. 하긴 한국에서도 케밥이 유명하지 기로스가 유명하지는 않았다. 나는 일반화의 오류를 사랑했다. 튀르키예 음식이 그리스 음식보다 두 배는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