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자르는 쉽고도 어려운 일
정식 출간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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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싫을 때가 있다. 다른 것에 빗대 봤을 때 뛰어나게 좋은 것도 아니고 헤어짐을 망설이는 이유를 대라고 하면 막상 찾지도 못하지만 확실히 떠나기 싫을 때가 있다. 장소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나에겐 체스메가 그런 장소였다. 자기소개서 쓰는 것에 익숙해진 나이는 좋아하는 것에도 굳이 이유를 붙여야만 마음이 편해져버리고 만다. 아무리 생각해도 바다 어디선가 흘러오는 짠 냄새가 좋았다거나 맥주 먹기에 딱 좋은 바람이 불었다는 이유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좋아하는 것 마저도 정량해야 하는 세상에서는 하등 쓸모없는 문장이었다.
며칠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헤어져야 했다. 가끔 새벽에 울리는 메일 알람을 통해 나는 몇 군데 대학원의 화상 면접 요청을 받은 상태였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면서 여행해도 되냐는 물음을 굳이 외면하고 있었다. 더구나 방문 면접을 위해 미국행 티켓을 예약해 버렸으니 이 여행의 시작은 충동적이었어도 끝은 어째 정해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귀국일이 정해져버리고 만 여행의 시간은 여지없이 소중하다. 느낌 가는 대로 한 군데에 눌러앉는 것과 새로운 곳을 보고 싶다는 욕망 사이에서 고민하다 후자로 타협을 했다. ‘이즈미르‘라는 대도시로 향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긴 바닷길을 이름도 모르는 개와 동행했다. 검은 개는 꽤 오랜 시간을 쫓아오더니 언제인가부터 매정하게 돌아가버렸다.
‘이즈미르’의 첫인상은 부산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 강이 끝나는 곳과 바다가 시작하는 곳이 궁금하다는 이유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었던 적이 있다. 결국 품었던 궁금증은 해결하지 못했지만 살면서 처음으로 부산에 도착했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째 낯선 튀르키예 땅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큰 바다를 원 없이 바라봤다. 바닷가를 달리는 올드카 몇을 지나치고 사람이 지나치든 말든 낮잠에 푹 빠진 개들을 지나쳐 멍하니 있기 좋은 햇볕 속에 앉았다. 여행지를 정할 때 바다가 좋은지 산이 좋은지에 대한 오래된 논쟁이 생각났다. 산보다는 훨씬 바다를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이유를 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바다 여행은 참 이상한 것이다. 산을 가는 여행은 설명하기 쉽다. 공기도 좋고 운동도 되고 심지어 높은 곳에 올랐다는 성취감도 가질 수 있다. 굳이 어려운 호르몬 얘기를 꺼내지 않아도 땀을 흘리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산을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동행과 많은 대화를 할 수도 있다. 심지어 하산하고 나서 막걸리 한 주전자에 감자전이라는 마리아주가 기다린다.
바다는 그런 곳이 아니다. 기껏 도착해봐야 할 수 있는 것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거나 아니면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뿐이다. 물장구를 치거나 수영을 할 수 있는 때도 한정적인 계절이고 사실 바닷바람은 꽤 매서운 편이라 몇 분 지나지 않아 바닷가에 앉아 있는 것도 궁상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산보다는 바다에 간다. 아무도 없는 겨울 바다도 좋아하고 사람은커녕 불빛도 없는 밤바다도 좋아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확실한 이유를 댈 수 있는 사람보다는 바다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 가끔 이유를 대야 할 상황이 오면 곤란하게 웃을 수밖에 없다. 멍청하게 웃으면서 바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크고 파란 바다였다.
바닷바람에 머리가 흩날렸다. 아름답게 흩날렸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머리 정리를 하지 않은지 꽤 오래돼서 노숙자 비슷한 몰골이었다. 거리를 걸어 다니며 미용실 비슷한 것을 찾았다. 머리 자르는 것은 늘 긴장되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더 그랬다. ‘어떻게 잘라드릴까요?’라는 질문이 대학 기말고사 문제보다 한 세 배는 어려운 것 같다.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외국에서는 더 그렇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감각을 관상에 집중해서 헤어 디자이너를 고르고 최선을 다해 달라는 눈빛으로 간절하게 바라보는 것뿐이다. ‘쿠아포 어밋‘이라고 이름 붙여진 미용실에서는 푸근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 한 명이 수건을 개고 있었다.
“어떻게 잘라줘요?” 안경 쓴 사장님이 말했다.
“튀르키예 베스트 스타일!” 대책 없는 내가 말했다.
사장님은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는 표정을 짓더니 금세 내 머리를 잘랐다.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가서 눈을 감고 있던 나는 그저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머리 감는 곳이 머리 자르는 곳 바로 앞에 있었다. 어디에 따로 누울 필요도 없이 머리 자르는 의자에서 앞으로 고개를 숙이면 머리를 감을 수 있었다. 어느새 늘어나버린 뱃살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기도 끝에 완성된 머리는 어째 많이 보던 머리였다. 군 생활 중 영내 이발소에 가면 완성되는 머리를 낯선 튀르키예 땅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영내에서는 그 머리를 ‘장교 머리‘라고 불렀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서 기분이 좋아졌고 사장님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튀르키예 아저씨에게는 참 이상한 하루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현석은 그리스에 오기 전부터 먹어야 하는 튀르키예 음식의 종류를 다 공부해 왔다. 사실 어지간히 유별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메뉴가 정해지니 뭘 먹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없어져서 편하긴 했다. 먹을 것을 정하고 나서도 굳이 음식점을 찾지는 않았다. 지나가다 있으면 먹는다는 우연에 의존한 방법은 내 여행 버릇이자 고집이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된장찌개를 먹고 싶다고 할 때 유명한 된장찌개 음식점을 찾는 것보다 우연히 들어간 고깃집에서 나온 된장찌개를 먹는 것이 더 맛있고 추억도 남는다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다.
그래도 가끔은 그 고집이 성공하는 편인데 튀르키예 채소 피자인 ‘라마춘‘도 그랬다. 대중교통을 타겠다고 동전을 바꾸러 온갖 가게를 들락거리다가 찾은 식당이었다. 사장님은 한국어는커녕 영어도 한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여차저차 ‘라마춘’을 시킬 수 있었고 얇은 화덕 피자 맛은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피자를 감자전처럼 얇게 구운 느낌의 음식이었다.
튀르키예 음식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 기분이 맛있는 음식에 좌우되는 것은 어째 부끄럽지만 확실한 일이다. ‘라마춘‘을 반으로 접어 씹으면서 그 가설을 입증했다. 피곤한 날이었다. 지하철을 타려고 했는데 지하철 매표소에는 아무 사람도 없었다. 무인 매표 기계는 지폐를 날름 먹더니 아무것도 뱉어내지 않았다. 다른 기계는 지폐를 넣으니 달라는 티켓은 안 주고 동전만 토해냈다. 역무원은 동전을 바꿔줄 지폐도 없었고 티켓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근처 식료품점에서 굳이 사지 않아도 될 간식을 사며 동전을 지폐로 바꿨다. 다른 역에서 마주한 비슷하게 생긴 티켓 기계는 지폐를 거부했다. 그런 난리를 두 시간 넘게 하고 나니 튀르키예 대중교통에 대한 불신이 머릿속에 자리를 잡았다. 어째 ‘라마춘’을 먹고 나서 다시 시도한 티켓 판매기는 여전히 문제였지만 그다지 화는 나지 않았다. 결국 키 큰 아저씨가 십 분 동안 내 지폐를 가지고 판매기와 싸웠고 불굴의 돌궐족 전사는 티켓을 꺼낼 수 있었다. 머릿속에 ‘라마춘‘ 생각밖에 없었던 동양인은 최고의 미소를 지었다.
하굣길은 짧지 않았다. 초등학생의 발걸음의 한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모험을 하겠다고 굳이 먼 길을 빙 돌아가는 괴벽 때문이기도 했다. ‘풀잎반’이나 ‘바다반’ 같은 이름에서 멀어져 ‘몇 학년 몇 반’하는 효율적이고 획일적인 삶에 익숙해질 때쯤이었다. 분명히 큰 도로를 따라가면 집에 손쉽게 갈 수 있었지만 어린 마음은 모험을 원했다.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같은 만화를 보고 나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다행히 하교 길 근처에는 모험을 할 만한 길이 많았다. 중학교 담장을 넘어 공사장 길을 통해 뒷산으로 집에 가는 길이 대표적이었다.
지금은 아파트가 비석처럼 세워진 곳이지만 그때는 다 쓰러져가는 판자촌과 구식 아파트와 공사판이 넘치는 곳이었다. 보조바퀴를 뗀 자전거 몇 대가 묶여 있는 집 근처에는 내가 ‘간판 무덤’이라고 이름 붙인 곳이 있었다. 간판을 제작하다가 망해버렸는지 아니면 다 쓰고 남은 간판 쓰레기들을 둘 곳이 없어 방치한 것인진 모르겠지만 다 낡아버린 간판들이 무더기로 있었다.
가끔 아무도 없는 집에 가기 싫을 때면 ‘간판 무덤’에서 간판을 밟고 놀았다. 그 간판 중 하나는 ‘터키탕’이라고 써져 있었다. 아마도 그때가 ‘터키’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을 때가 아닌가 싶다. 늘 모든 것에 대해 궁금해하고 질문하라던 선생님은 ‘터키탕’이 무엇이냐는 어린아이의 질문을 회피했다. 나중에 크고 나서야 ‘터키탕’은 튀르키예와는 아무짝에도 관련이 없는 성매매 업소라는 것을 알게 됐다. 동심을 지켜 주신 선생님께 감사를 표한다.
대학원 면접을 준비하고 있다가 문득 그런 옛 생각이 났다. 하기 싫은 일을 계속하고 있자면 어쩔 수 없이 재밌는 생각이 난다. ‘튀르키예’에는 정말 ‘터키탕’이 있는지에 대한 검색을 하다가 증기로 목욕을 하는 공중목욕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보통 ‘하맘’이라고 부르는 공중목욕탕에서 식사도 가능하고 마사지도 가능한 것 때문에 한국에서 다르게 와전된 것 같았다. 어쨌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맘’ 앞에 도착했다.
코스는 풀 코스로 결제했다. 부산에서도 못 받아본 부산 풀 코스를 튀르키예 어디 구석에 있는 ‘페스 스파 하맘’에서 받아보게 됐다. 입장하고 나서 대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눈치를 보고 있다가 뒤에 들어온 사람이 가는 곳으로 졸졸 따라갔다. 처음 들어간 곳은 증기 목욕탕이었다. 우리나라 목욕탕처럼 몸을 담그고 있을 수 있는 곳은 없지만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이 여러 군데 있었다. 아저씨들은 어딘가에서 가져온 놋그릇으로 물을 받아 몸에 끼얹고 있었다. 공간 가운데에는 넓은 돌이 있었다. 대체 이 돌침대는 왜 있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따뜻한 물을 충분히 즐긴 사람들은 돌 위에 척 누웠다. 돌판에 햄 굽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누군가는 돌 위에서 잠을 잤고 누군가는 잠자는 친구 얼굴 위에 굳이 물을 부었다. 물을 부은 친구를 쫓아다니는 코미디를 보고 있다가 고온의 습기에 수육이 되어가는 기분이라 금세 나왔다.
처음 들어올 때 눈인사했던 아저씨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도 한국 사우나처럼 모래시계가 지날 동안 식혜도 없이 뜨거운 것을 버티지 못하면 어른 취급을 받지 못하는 건가 싶었다. 서로 ‘와이?’와 ‘노!’만 반복하다가 아저씨의 손짓을 따라서 다시 목욕탕에 들어갔다. 목욕탕 뒤쪽에 세신을 하는 곳이 있었다. 돌침대 위에 누워서 때를 밀고 거품을 칠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멍청하게 천장을 보고 있었을 뿐이고 딱 봐도 장인처럼 보이는 세신사분이 의미 모를 구호와 함께 내 때를 밀고 거품을 칠했다.
가운을 입고 양머리 비슷한 것을 머리에 올리고 로비로 내려갈 때는 이곳이 한국인지 튀르키예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나는 튀르키예 아저씨들을 구경했고 튀르키예 아저씨들은 나를 구경했다. 갈 곳을 잃고 앉아 있으니 또 누군가가 불렀고 웬 방으로 들어가 마사지를 받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방에서 할아버지와 통성명을 하는 것은 뭔가 부끄러운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향기로운 기름을 손에 바르고 내 온몸을 두들기는 것은 더 부끄러운 일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받아본 마사지는 예상보다 꽤 폭력적이었고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더 부끄러울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마사지가 끝나니 몸이 날아갈 것 같이 편했다.
노곤한 기분으로 로마 귀족처럼 침대에 누웠다. 사람들은 간단한 음식을 먹으면서 축구를 보고 있었다. 그날은 ‘페네르바체’와 ‘갈라타사라이’라는 이스탄불을 연고지로 둔 두 유명한 축구팀이 경기를 하는 날이었다. 반쯤 졸면서 축구 경기를 보면서 발 마사지를 받는 것은 더 이상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로마 귀족이나 조선 양반으로 태어났다간 미안해서 밖에도 나가지 못했을 것 같았다. 내 발을 마사지하는 사람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페네르바체 팬이었다. 페네르바체 팬이 자기가 좋아하는 경기 대신 내 발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무안해져서 마사지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도했다. 민망하긴 했지만 피로가 풀렸다.
온몸을 삶고 불리고 맞다 보니 어째 육포가 된 기분으로 ‘하맘’을 나섰다. 육체의 피로도 정신의 피로도 하늘 어딘가로 날아간 것 같았다. 그 나른하고 노곤한 기분은 택시기사를 만나고 나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터무니없이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부르는 택시 기사 앞에서 반값을 불렀다. 첫 번째 아저씨는 화를 내며 그 가격엔 아무도 가지 않는다고 했다. 옆에 있던 두 번째 아저씨는 그 돈 줄 거면 지하철이나 타라고 했다. 조용히 서 있던 세 번째 아저씨는 따봉을 날리며 자기와 가자고 했다. 말싸움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좋은 경쟁사회였다. 부산 택시보다도 더 활기차고 덜컹거리는 택시 서비스는 아무것도 미안하지 않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