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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테네 (4)

그리스 음식은 맛이 없어요

by 석지호

정식 출간 예정입니다 !

https://tumblbug.com/balkantravel


이태원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가끔 그 이유만으로 알게 된 사람들에게 이태원 음식을 추천해야만 했다. 지금이야 너무 특이하지도 너무 무난하지도 않은 음식점 몇 가지를 고민 없이 추천할 수 있지만 새내기 때는 그렇지 못했다. 토요일 자율학습을 끝내고 가봤던 곳이라고 해봐야 ‘피자리움’의 조각피자나 ‘타코벨’의 퀘사디아 정도였다.


초등학교 때 짝사랑했던 친구를 수소문해서 이태원에서 만날 때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검색을 해가며 결국 고른 곳은 그리스 음식점이었다. 고기를 꼬치에 끼워 구워낸 ‘수블라키’랑 빵에 고기와 야채를 넣어 먹는 ‘기로스’를 먹었던 것 같다. 내 인생 첫 그리스 음식은 텁텁하고 뻑뻑했다. 맛이 없었다는 뜻이다. 추억도 그랬다. 뭔가 뭉클한 감정을 기대하고 나갔는데 막상 만나니 그런 감정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괜히 여자친구가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만 만들어 버렸다.


그리스에서 먹은 그리스 음식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실 그리스 음식은 건강식으로 유명하다. 별다른 향신료도 사용하지 않고 기름 쫙 빠진 고기나 소금 친 것을 까먹은 것 같은 감자튀김이나 어딘가 허전한 요거트의 조합이다. 건강하다는 뜻은 다시 말하자면 맛이 없다는 뜻이다. 첨언하면 값이 비싸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테네 거리를 걸어 다닐 때 영 힘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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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 빵 쪼가리와 구운 고기를 입에 쑤셔 넣고는 ‘아테네 현대미술관’을 향했다. 방향성도 없고 목적도 없었던 여태 껏의 여행과는 다르게 현석을 만난 후로는 꽤 흥미로운 것들을 보러 다녔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와 같은 기분으로 흐름에 몸을 맡겼다. 어디에 갈지 별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다. 타인의 계획대로 흘러가는 여행은 오히려 어렵지 않았다. 길을 찾는 것도 그랬다. 현석의 장점은 한 세 시간 정도를 고민해야 하나 나올까 말까 한 것이었지만 길 찾는 능력만큼은 늘 인정하는 바였다.


현대미술은 어디에서나 그렇듯 알 듯 말 듯한 감정을 가져온다. 굳이 해석하자면 이런 의미가 있지 않나 상상하는데 결국은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웬 헤드폰을 줄줄이 천장에 걸어 놓은 작품이나 거대한 막대기들을 이리저리 겹쳐 놓은 작품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 별다른 감흥을 받은 것은 아니고 다리가 아파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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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술관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미술 작품이 싫은 것은 아니다. 다만 미술관에 가면 작품과 작품 사이를 언제 넘어가야 하는지 영 모르겠다. 뚫어져라 한 작품을 쳐다보고 있자니 어째 시간이 아깝고 산책하듯 가볍게 보자니 돈이 아까워져버리고 만다. 가끔 시집을 봐도 비슷한 기분이다. 하나의 시를 읽고 상상하라고 하면 하루 종일이라도 할 수 있지만 보통 쓱 읽어버리고 만다. 예술에 대해 무지몽매한 현대인을 위한 가이드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 ‘몇 인치의 유화 그림은 몇 분을 보고 넘어가세요’ 같은 팁이라도 있으면 나 같은 멍청이도 미술관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팸플릿에는 당연히 그런 팁이 적혀있지 않았다. 그래서 노아의 방주 비슷한 배 앞에서 시간을 좀 보내다가 찢어진 옷이나 쓰레기봉투 전시 앞에서는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 창의력이 조금 올라갔을까 싶었는데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미술관 외에도 여러 유적지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파르테논을 보고 난 뒤라 그런지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리스 신들 중 가장 높다는 제우스의 신전도 마찬가지였다. 제우스 신전은 다 부서지고 몇 개 기둥밖에 남지 않은 곳이었다. 허허벌판에 혼자 솟아 있는 기둥을 보면서 벤치에 앉아 졸았다. 분명 불경한 짓인 것 같긴 한데 그 근처에서 아이들은 축구공을 차고 있고 노숙자들이 쓰레기통을 뒤지는 걸 보면 조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가끔 그런 애매한 볼거리를 보면 여행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이 애매한 아름다움을 보고 얼마나 경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무시해도 되는지 알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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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음식에 대한 입장이 최악으로 빠져버린 건 술 때문이었다. 현석과 나는 숙소에서 저녁과 함께 술을 먹고는 했다. 보통은 맥주였는데 ‘그리스 전통 술’이라는 타이틀을 보고 ‘우조’라는 술을 샀다. 검색을 해보니 주정에 고수와 아니스, 계피 같은 향신료를 넣고 숙성한다는 것 같았다. 소주처럼 투명하게 생겼는데 물에 타면 우유처럼 뿌옇게 변했다. 적어도 ‘식욕을 돋우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 나무위키 자료는 거짓말인 것 같았다. 이 술을 식전에 마시면 어떤 산해진미가 나와도 양치를 하고 싶어질 것 같았다. 그만큼 내 인생에서 마신 술 중에 최악이었다. 온갖 역한 냄새의 풀들을 입에 넣고 씹는 느낌이었다. 한 잔은 그리스 식문화에 대한 존중으로 마셨지만 두 번째 잔에선 존중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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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꽤 괜찮은 그리스 맥주를 마시며 현석과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한국어 하는 것이 싫어 도피한 인간은 결국 한국어를 말하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고민부터 과거에 대한 실수까지 대화 내용은 다양했다. 보통 내가 혼자 말하고 현석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마지못해 몇 마디 하는 것에 불과했다. 술기운 때문인지 나는 어디에서부터 인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취직이라거나 시험 같은 길을 놔두고 서른이나 먹고 미국에 가겠다는 꿈이 가당하기는 한가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맥주 한 캔에도 쉽게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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