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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획이 아닌 지속가능한 계획

새벽에 헬스장으로 향하면서

by 바쁜남자

초등학생 시절, 방학이 되면 가장 먼저 생활계획표를 짰습니다. 스케치북에 동그란 원을 그린다. 숫자는 1부터 24까지 표시합니다. 중심점에서 바깥으로 선을 그어가면서 시간을 피자조각보다 잘게 쪼개 알찬 계획을 짭니다. 제일 먼저 넉넉한 취침시간을 확보하고, 아침 점심 저녁 식사시간까지 확보한 뒤, 나머지 일정을 적절하게 채워갑니다. 나눈 칸마다 무엇을 할 것인지 적고, 예쁘게 색칠까지 하면 생활계획표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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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계획표를 유심히 살펴보면 빈틈이 없습니다. TV 시청시간은 1시간만 잡아놨는데, 보다보면 1시간을 훌쩍 넘기기 마련입니다. 아빠의 퇴근시간이 늦어지면 저녁 식사시간이 조금씩 미루어지면서 그 다음 일정이 다 흐트러집니다. 세상은 어김없이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 혹여 계획에 없던 일이 추가된다면? 그 순간부터 미리 짜둔 생활계획표의 역할과 의미는 무의미해집니다. 그냥 되는대로 사는 거죠.



나이를 먹어도 똑같은 일은 반복됩니다. 계획을 짜고 지키지 못하고, 또 계획을 짜고 지키지 못하고. 이는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고 하여 의지의 문제로 가볍게 치부할 일이 아닙니다. 단순히 노력 부족으로 계획을 지키지 못한 걸 정당화하는 것만큼 세상 쉬운 변명거리도 없습니다. 개인의 문제로 단정 짓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습니다. 노력과 의지를 뛰어넘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문제를 빈틈없이 만든 생활계획표에서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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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 어김없이 헬스장에는 신입회원들로 가득합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건강하고 멋진 몸을 만들기 위해서 운동을 선택한 분들입니다. 새해 계획표를 짰다면, 어느 한 조각에 ‘운동하기’를 새롭게 추가한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현명하고 탁월한 선택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건강하고 멋진 몸을 만들기 위해서 운동을 선택하셨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포기하셨나요? 어제까지만 해도 운동하는 이 시간에 무엇을 하고 계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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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시절 그렸던 생활계획표를 다시 또 올려봅니다. 우리는 스케치북에다가 1시부터 24시까지 있는 동그란 시계를 그렸습니다. 누구는 25시까지 그리고, 누구는 23시까지 그리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누구에게는 24시간입니다. 24시간 동안 무엇을 하며 어떻게 지내느냐가 내 하루를 결정합니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만든 하루하루가 쌓여 내 인생이 됩니다. 그러니 하루 일과 중에 ‘운동하기’가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그 삶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삶입니다. 누구나 내 삶에 책임을 지고 충실하게 살고 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시간활용은 계획이 아니라 금기를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먼저 정하고 해야 할 것을 계획하면 그것은 실천 가능한 계획이 되지만, 해야 할 것만 정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알코올중독자가 소주공장에서 일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 다음 해야 할 것들은 비중을 정해 하루 중 어느 때든 반드시 그만큼 수행하면 된다. 기차 시간에 맞추듯 시계시간에 쫓겨 다니면 계획만 세우다 마는 어리석음을 반복할 수 있음을 명심하자.


박경철의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 - 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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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안타까운 부분은 “운동해야지! 해야지!” 말만 하면서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시작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생활계획표에 빈틈이 없으니 ‘운동하기’가 들어갈 틈이 없는 건 너무 당연합니다. 무리한 계획은 유리잔에 찬 물을 흘러넘치게 합니다. 시골의사 박경철은 시간의 가치는 밀도가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파편처럼 흩어져있는 시간을 압축하고 정돈함으로써 시간의 밀도를 높여야 시간의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올바른 시간활용은 계획을 세우기 이전에 금기를 세우는 것이 우선이라는 걸 강조합니다.



가수 이소라는 자신의 작사 스타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다음날 자고 일어나서 보고 고치고. 다음날 다시 자고 일어나서 보고 고치고. 줄이고 줄이고 줄여서 가장 평범한 말들이 특별하게 들릴 수 있도록. 제일 중요한 거는 계속 줄이는 거예요. 뭔가를 늘이는 게 아니라. 단어도 발음도 곡에 잘 맞게 조금씩 줄여서 제일 딱 맞는 형태로 만드는.” 익숙한 내 하루도 유심히 관찰하면 줄이고 줄여야할 시간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줄이다보면 죽어있던 시간이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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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이하여 건강하고 멋진 몸을 만들기 위해서 운동을 선택하셨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포기하셨나요? 어제까지만 해도 운동하는 이 시간에 무엇을 하고 계셨나요?” 이 질문에 당당히 답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포기하지 않고, 억지로 우겨넣은 계획이라면 오래가지 못할 확률이 높습니다. 집안 정리의 시작은 불필요한 물건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손에 든 것을 놓아야 다른 것을 잡을 수 있습니다. 시간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무엇을 선택하든 새로운 계획이 아닌 지속가능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새벽에 헬스장으로 향하며

오늘도 딴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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