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유산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 AI 시대에도 유효한 사유의 힘

by 발가락꽃



철학은 인류사유의 역사를 보여준다. 철학(Philosophy)이라는 단어는 고대그리스어 필로소피아( Philo-sophia)가 어원이다. 의미는 사랑(Philo)과 지혜(Sophia), 즉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세상과 인간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의미를 찾는 행위를 우리는 철학이라고 한다.



철학은 이미 사회가 우리에게 준 대답을 그대로 믿기보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만들어내며,, 표면적 현상만 보기보다 현상의 근원과 구조를 들여다본다. 그래서 프랑스어로는 철학자를 다른 이름으로 생각하는 사람(penseur)라고 하기도 한다.



철학의 한자어 의미는 지혜로울, 밝을 哲(철), 배울 學(학), 한자어의 의미도 지혜에 대한 사랑과 공부, 즉, 지혜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기원전부터 시작된 이 학문은 여전히 정해진 해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철학은 답보다는 길을 제시한다. 관점을 제시하고 그 관점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형식을 제공하는 것뿐이다. 정해져 있는 진리나 연구를 통한 공통의 결론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철학자마다 다른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고 이야기한다. 시력이 저마다 다르듯, 각자에게 맞는 철학이라는 안경이 필요하다. 그래서 각자 공감하는 철학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때로는 삶을 조율하기도 한다.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 탐구하고 연구했으면서도 아직도 그렇다 할 해답이 없는 학문을 아직도 이야기하는 것일까? 여기에 바로 철학의 강점이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기원전 플라톤의 철학을 아직도 연구한다. 그에 반해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했던 지동설은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지구가 돈다는 것은 이젠 하나의 사실이 되었고, 그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플라톤은 여전히 오늘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렇듯 철학은 시대를 넘어 질문하게 만들고, 그 안에서 계속 살아 있다.



실존주의자 알베르 카뮈는 우리 삶에 내재한 이런 부조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카뮈는 우리의 삶을 시지프의 반복되는 형벌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시지프는 코린토스의 왕으로 신보다 똑똑하고 교활한 꽤 많은 인간이었다. 그는 죽음을 속이기도 했고 신들의 비밀을 인간에 누설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형벌로 결국 끝없이 반복되는 형벌을 받는다.



무거운 바위를 산 꼭대기까지 밀어 올려야 한다. 정상에 다다르면 바위는 다시 굴러 떨어지는데, 그러면 시지프는 그 바위를 다시 올려야 한다. 이것을 영원히 반복한다. 무의미한 노동의 무한반복이 바로 시지프의 형벌인 것이다.



이게 바로 카뮈가 이야기하는 인간 존재의 부조리이다. 그러면 다시 질문을 해보자. 시지프가 들어 올리는 돌은 무의미한 단순노동, 하루의 일과 같은 것일까? 신이 내린 형벌은 단지 육체적 노동이었을까? 이에 관해 카뮈의 관점을 비판하거나 다른 누군가의 철학과 비교하기보다 이에 대한 순수한 관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부조리란 인지와 현상에서 오는 괴리라고들 한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답이 없는 질문을 반복한다. 이 반복하고 반복하는 질문이 시지프의 돌과 비슷하다. 중요한 건 이 돌이 저 산 위에 멈춰서 굴러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다.



질문은 바위를 가지고 끝까지 올려놓는 행위이자 과정이다. 어찌 보면 시지프는 이 큰 돌로 강인한 육체를 가지게 되며, 매일 같은 일을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 고민하고, 전략을 짜면서 다음날을 맞이한다. 어떻게 보면, 다시 굴러 내려오는 돌은 한순간의 절망이면서도 내일의 희망이다.



우리는 멈추지 않는 삶을 살며, 먼저 살아온 사람들의 유산을 가지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유산이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질문하는 능력이다. 질문은 인간의 본능이며, 질문 없는 삶은 단지 수동적인 삶이다.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순응하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질문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고, 때로는 불편하지만 날카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찌른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계속 찔러야 계속 발전한다. 피부과 시술 중에는 의도적으로 상처를 내어 피부가 스스로 재생하게 만드는 치료가 있다고 한다. 이것처럼 사회 역시 자극을 받아야 새 살이 돋으며 강해진다. 철학적 질문은 그런 자극이다. “왜 이래야 하는가?”, “정말 그래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은 때로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이 바로 회복과 성찰의 출발점이다.



계속 철학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 이 시대에도 ‘질문’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주체로 살아가기 위한 시작점이다. 질문과 그에 대해 스스로 하는 답이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사회의 방향을 되묻는 토대가 된다. 이 모든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AI와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AI는 질문을 전제로 작동한다. 질문이 없으면, 아무런 답도 줄 수 없다. AI는 무한한 정보의 저장소일지언정,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결국 AI의 작용도 인간의 질문하는 능력에 달려있다는 이야기이다.



누군가는 "AI는 불편하다. 왜 내가 먼저 아는 게 있어야 하고, 질문을 던져야 하느냐. 그럴 바엔 안 쓰겠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AI시대에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고,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질문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질문이다. 질문을 하는 행위 안에는 매일의 삶을 견디게 하는 의지와 방향성이 담겨 있다. 시지프도 매일 바위를 올리며 매번 다른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저 바위가 맨 꼭대기에서 멈춰서 굴러 내려오지 않을까 하는 방법을 찾으며 말이다.



물론 계속된 질문은 우리를 피곤하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질문은 곧 정신의 근육을 길러준다. 매일 자신에게 질문하고, 자신의 내면을 돌보는 일은 운동처럼 순간 몸을 피로하게 하지만, 결국 몸을 건강하게 해 준다.



AI는 생각을 대신해 주지만, 질문까지 대신해주진 않는다. 질문이 있는 곳에 사고가 있고, 사고가 있는 곳에 인간이 있다. 그리고 이 인간만이, 알고리즘이 아닌 감각과 사유로 세계를 다시 읽어낼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질문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그게 바로 철학의 유산이며, 인간의 품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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