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사유·문화·뇌 건강까지 지배하는 이유
* 8월 15일에 잘못 올라갔던 글입니다. 혹시 보신 내용이라면 8월 15일 편 봐주세요.
인문학의 근본은 무엇일까? 인문학은 글 즉, 언어로 이루어진 학문이다. 철학은 언어로 질문하고, 문학은 언어로 감정을 묘사하고, 역사는 언어로 과거, 현재를 기술한다. 언어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인문학이라고 하는 정신의 집을 떠받치는 뼈대이다. 언어가 없다면 인간은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을 표현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도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라는 그 유명한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말에 계속 자극을 받는다. 유아기에 언어 자극 없이 뇌가 성숙한다면 자라난 후에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1867년 인도에서는 늑대와 자란 소년을 구출한 적이 있다. 그는 구조된 이후 20년 넘게 고아원에서 생활했지만 말을 배울 수가 없었다.
냉전시대, 루마니아 공산주의 체제하에 자행되었던 보육원에서의 아동학대도 비슷한 사례를 만들어냈다. 1966년부터 강력한 출산 장려 정책이 실시되면서, 국가가 가정보다 우수하다는 이데올로기가 퍼지게 되었으며 그 결과, 수십만 명의 아동이 보육원에 강제로 보내졌다. 보육원의 아이들에게 영양, 위생 같은 문제는 없었지만, 사람과의 접촉, 포옹 대화, 놀이나 감정적 교류는 거의 없었다. 이 아이들은 훗날 입양 이후에도 언어 발달에 문제가 있었으며 장기적으로는 뇌 구조 변화를 겪기도 하는 등 후유증에 시달렸다.
물론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당장 반려동물을 키운다면 이들도 우리와 호흡을 함께 하며,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려 하기도 하고 무언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언어는 더 넓은 사유의 기본 틀 같은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 어떤 언어를 쓰는지에 따라서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며, 한 집단이 쓰는 언어에 따라 문화도 다르다.
이런 것을 보여주는 사례는 많았다. 미국에 사는 라틴계 여성들을 대상으로 동일한 의미의 말을 스페인어와 영어로 이야기할 때, 표현 방법이 달라지는 것이 그중 하나이다. 당장 나만 해도 어떤 느낌을 표현하거나, 어떤 상황을 전달할 때 프랑스어로 하는지, 한국어로 하는지에 따라 표현 방식을 달리한다. 예를 들어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프랑스어로 이야기할 때는 동일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이런 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이 말을 프랑스인에게 전해달라고 했을 때, 이 말처럼 내 등에서 땀이 나게 하는 단어가 없다. 만약 이것을 직역해서 이야기한다면 프랑스사람들이 기분 나빠할 것이다.
요컨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와 연결되기 위해 언어를 배우며, 이미 사회에서 사용하고 있던 언어를 통해 문화를 체득하기도 하며, 사고하는 방식도 일정 부분 정해지기도 한다. 물론 언어 자극은 어렸을 때만 필요한 게 아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언어자극이 일정기간 동안 사라지면 우리의 뇌는 자연적으로 노화한다.
엄마는 옛날부터 청력이 좋지 않았다. 너무 이른 나이에 보청기는 껄끄러운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있던 엄마는, 더 이상 이를 방치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병원에 가셨다. 의사 선생님은 보청기를 하는 게 좋은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셨다. 귀가 안 들리면 소통이 어려워지며, 이로 인해 뇌에 언어 자극이 점차 사라지면, 인지 장애를 동반한 조기 치매가 올 수도 있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대화는 단순한 말의 교환이 아니라 기억력, 어휘력, 판단력을 바탕으로 하는 뇌의 기능 중 하나이기 때문에, 대화를 통한 소통이 줄어들면 이 기능이 점차 비활성화되며 어느 순간 관련 뇌 회로가 퇴화하게 된다. 즉, 말이 줄면 어휘력이 줄고, 사람들과의 소통이 없으면 상황 판단력이나 감정 조절 능력도 둔해져 결국 인지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혼자 하는 생각은 소통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다. 혼자서 하는 생각은 대개 기존의 패턴 안에서 도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정보, 피드백이 자극이 없으면 뇌는 확장하지 않는다. 또한 타인과의 대화는 예상치 못한 질문, 감정적 반응, 논리적 충돌 등으로 뇌를 당황하게 하고, 적응하게 만든다. 이런 놀람과 그리고 이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 뇌를 활성화시킨다. 하지만 타인과의 소통 없이 혼자만 생각하면 감정 표현 능력, 공감력, 소위 말하는 눈치 같은 사회적 인지기능이 줄어든다.
재미있는 건 청각 장애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이런 부분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소통이 반드시 “음성언어”일 필요는 없다는 반증이다. 청각 장애인 같은 경우에도 이미 수화, 문자, 시각 언어 등으로 사회적 소통체계를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책을 읽는 것도 고립을 막아준다. 물론 직접적으로 일대일 소통을 하는 음성언어와 반응 차이가 있는 글이 다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저자와의 지연된 대화이다. 타자의 언어를 차분히 받아들이고, 해석하면서 반응해야 하는 느린 상호작용이며, 타자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시선을 느끼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타자의 존재를 전제하는 언어와의 접촉이 있는 한 직접적인 대화가 배제되더라도 사고는 계속 유지될 수 있다.
가끔 사람들은 혼자 하는 생각을 자신과의 대화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외부의 자극 없는 그리고 그 자극을 소화를 시키는 행위가 없는 소통은 소통이 아니다. 언어의 본질은 사회성에 있기에,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위해서 우리는 언어를 배운다. 그리고 타자의 언어를 흡수하고 응답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관련 뇌 기능은 활성화된다.
소통의 부재는 사람을 무디게 만들고 세계를 향하는 문을 닫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때야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느끼는지 알게 된다. 그래서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으로 인해 본인 존재를 확인하고, 본인을 다시 바라보기도 한다.
디지털화된 요즘 우리는 어떤 소통을 하고 있는가? 소통을 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간단한 일방적 소통을 찾는다면 핸드폰을 보기보다는 책을 보자. 그 안에 나를 비난하지 않을 조용한 타인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