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 만들어주는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자존감
요즘 시대에 자신을 설명하는 언어로 가장 흔히 쓰이는 것이 있다면 아마 MBTI이다. "난 ENFP라서 그래", "INTJ는 원래 혼자 있는 걸 좋아해" 같은 말들이 방송에서도, 일상 대화에서도 당연하다는 듯 등장한다. 조금 더 이전 세대에는 혈액형이, 또 그전에는 별자리가 지금의 MBTI 같은 역할을 했다.
우리 엄마는 항상 사주를 본다. 해가 바뀔 때도 사주를 보고, 대소사를 앞두고도 사주를 본다. 그러다가 이젠 본인이 사주를 공부하기 시작하셨다. 그 후부터는 돈 받고 사주를 봐주는 사람들의 말을 빌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공부한 내용으로 나를 설득하신다.
내용은 항상 대동소이하다. ‘나는 무얼 가지고 태어났고, 자신은 무얼 가지고 태어났고, 이런 것 때문에 넌 성격이 그렇고, 난 성격이 그렇다.’ 이걸 가만히 듣다 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혹하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들을 때마다 스스로 하는 질문이 있다.
‘어떻게 이런 걸 그렇게까지 믿을 수 있을까?’
‘우리는 왜 이렇게 자신을 어떤 범주 안에 넣고 싶어 할까?’
‘왜 '나는 어떤 사람이다'
'넌 이런 유형이다'라고 자신을 규정하고 싶어 할까?’
이유는 명확하다. 인간은 스스로를 이해하고 싶어 하며, 동시에 타인에게도 이해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미 정해진 범주로 자신을 규정하고 싶어 하는 건 건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갈망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게 되면, 일일이 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타인에게 일정한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고, 안정된 체계 속에 속해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이 확신 덕분에 혼란스러운 내면을 진정시킬 수도 있고, 흔들리는 자아를 붙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자기규정은 표면적인 이해에 머무를 위험도 안고 있다. MBTI는 총 16가지, 혈액형은 4가지, 별자리는 12가지이며, 그 안에 우리가 가진 모든 생각, 기억, 감정, 반응이 다 담길 수는 없다. 인간은 훨씬 더 복잡하고, 훨씬 더 변화무쌍하다.
동일한 범주에 묶인 인간들도 각자 개성이 천차만별이다. 진짜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세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인문학의 쓰임은 여기에 있다.
인문학은 인간의 감정과 사유, 역사와 언어, 관계와 윤리를 파헤친다. 한 인간의 존재를 단일한 유형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현상 속에서, 삶의 바탕에서 유사성과 차이를 발견하는 게 인문학이다.
예로부터 쌓여왔던 인간의 행동, 그 안에서 패턴들을 찾아내고 그걸 토대로 지금을 사는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게 한다. 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정서적 데이터베이스'를 확장시켜 주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만날 때 우리는 가급적이면 그 사람을 미리 예단하고 싶어 한다. 첫인상이라는 이름으로 이 사람은 이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람에게 테두리를 씌운다. 이건 과거의 누군가와의 경험, 감정, 상처, 위로 같은 기억을 바탕으로 만든 범주 같은 것이 아닐까?
어렸을 때부터 친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정말 착하고 헌신적인 친구였다. 그 친구의 취미는 손톱 손질이었는데 손이 참 하얗고 길었고 손톱도 예뻤다.
유학 생활 중에 만난 엄청나게 까칠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랑도 친해졌다. 하지만 관계에서는 아무래도 삐걱거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손이 내 친한 친구 손과 똑같이 생긴 게 아닌가. 까칠한 친구 손을 볼 때마다 뭔가 마음이 편해지는 내적 친밀감을 받기 시작했다.
단순한 예로 이야기하자면, 내가 많이 사랑했던 사람과 어떤 모습이 닮은 느낌의 사람이 있다면 옛날의 그 사람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안에는 '나를 웃게 했던 그 사람'과 '나를 아프게 했던 그 사람'의 기억들이 견고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건 아기들이 자아를 형성해 나가는 모습과도 닮아있다. 아기가 애착을 토대로 세상을 대한다는 것은 아이를 키워보고 아기 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말이다.
아기는 편견을 형성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가 없다. 그렇기에 부모와 올바른 애착을 형성하고 모두들 자기를 예뻐하는 긍정적 데이터베이스가 많다면, 이 아기가 커가면서 인간관계를 형성할 때는 자기가 가진 데이터베이스에서 '사람들은 나를 해치지 않고 나에게 잘 대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종의 편견이 형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편견은 항상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만약 부모는 매일 싸우고, 아무도 아이를 돌보지 않으며, 아이의 사회적 접촉도 차단되어 있다면, 이 아이의 편견을 만들어내는 데이터베이스를 구성하는 건 제한된 몇 사람뿐이며, 결국 이 아이의 세계는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는 불안한 세계가 된다.
나중에 인간관계를 형성할 때 인간에 대해 긍정적 편견을 가지려고 해도 데이터베이스가 없어 항상 두려워해야 하며, 내가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확신을 가지기도 어렵다. 일반적으로 외향적인 사람들의 행복 지수가 더 높다고 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넓고 다양한 사람을 마주하는 경험으로 좀 더 많은 긍정적 편견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심리학자 안나 프로이트는 이를 '방어기제'라고 설명했다. 인간은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세계를 필터링한다. 필터링의 핵심 도구가 바로 '선입견'이며, 이 선입견은 단순히 나쁜 감정이 아니라 무언가를 알아가기 전 ‘어떠할 것’이라는 예측에 오히려 가깝다.
이런 예측의 도구가 바로 과거의 감정 데이터베이스이다. 이때, 인문학적 독서와 감상의 경험은 이 데이터베이스를 풍성하게 하도록 도와준다. 다양한 인물의 삶과 생각을 접할 수 있고, 이것은 곧 내면에 여러 가지 가능성으로 가득 찬 세계, 즉 유연한 세계를 만들어낸다.
인문학은 우리가 정신적으로 마음껏 활동할 수 있게 하는 행동 기준점을 제시하기도 한다.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면 행동하기가 조심스럽다. 예를 들어 낯선 나라에 여행을 갔다고 가정해 보자.
여행 중에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었던 모든 규칙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에 긴장상태에서 주변을 관찰하고 그 나라의 규칙을 찾으려 무단히 애를 쓰게 된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던 익숙한 곳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규칙을 잘 알고, 만일 누군가가 나를 비난한다고 해도 내가 알던 규칙에 어긋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이 규칙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아기에서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다. 부모가 너무 허용적일 경우 아이는 더 많은 불안을 느낀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세계에 나와, 무엇이 해도 되는 건지, 무엇을 하면 안 되는 건지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준이 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구별하면서 우리를 보호한다. 인문학은 나와 타인이 가지는 공동 감정이라는 걸 구체적으로 보여주면서 나와 타인을 비춘다.
그래서 실제로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느낄지 알게 된다. 인문학을 통해 인간사의 감정들과 약속들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할 마음속 베이스를 구축할 수 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인문학은 우리를 정의하고, 인간 공동의 정서에 울타리를 쳐주면서 나의 행동반경에 자유로움을 준다. 사람들 사이의 규칙,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그리고 많은 물음을 통해 단단히 얻어진 답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면 누군가가 나를 비난해도 정서적으로 작아지지 않는다. 이것이 인문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견고 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