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을 되찾기 위한 인문학적 도구들
“그냥 힘든데, 왜 힘든 지 모르겠어요.” 상담실에서 수없이 들려오는 이 말만큼, 지금 우리가 겪는 정서적 풍경을 요약해 주는 표현도 많이 없을 것 같다. 감정은 넘치지만, 감각은 무뎌진 시대.
너무 많은 정보를 필터링 없이 빠르게 받아들이는 일상 속에서, 오히려 스스로의 감정을 제대로 느끼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즉 다양한 감정을 분출하면서도 그 감정의 근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스트레스가 많아서’도, ‘내가 약해서’도 아니다. 지금 우리에겐 감정과 거리를 두고 그 원인을 바라볼 여유가 없다. 사회와 나 사이에 여백이 없고, 자극과 반응 사이에 사유의 쉼표가 없다. 어떻게 보면 이건 우리가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를 택하면서 이웃과의 물리적 거리감을 잃고, 그 대신 정신적인 벽을 쌓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예전엔 감정을 억제하던 시대였다면, 지금은 그 반대다. 지금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시 표현하고, 불편한 감정을 곧바로 드러낸다. ‘프로불편러’라는 신조어가 생겨난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이런 감정 표출이 정당하다면 사회를 변화시키는 긍정적인 힘이 되기도 하지만, 모든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나의 기준을 타인에게 요구하는 태도는 우리 사회를 점점 더 소란스럽고 피로하게 만든다.
자신을 돌보기 위해서는 거울이 필요하다. 그런데 거울에 너무 가까이 붙어 있으면, 내 얼굴조차 볼 수 없다. 전신을 보기 위해선 거울과 적당히 떨어져 있어야 한다. 감정의 사유도 마찬가지이다.
감정을 제대로 비춰보려면 감정과의 거리가 확보되어야 한다. 한번 멈추고 끊어가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생각의 속도와 방향을 조절할 수 있는 힘, 그 기반이 바로 인문학에서 있다.
인문학은 빠르게 진행돼 가는 세계에서 종종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인문학은 “무엇이 쓸모 있는가?”가 아니라 “왜 그것이 쓸모 있는가?”를 묻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쓸모’와 ‘유용성’에 많은 가치를 주는 사회에 인문학은 속도를 늦추게 하고 다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게 한다.
김아영 작가의 ‘딜리버리 댄서의 구’라는 비디오 작품이 있다. 이 작품에서는 ‘에른스트 모’라는 라이더가 등장해 ‘딜리버리 댄서’라는 어플을 이용해 최단속도로 배달을 한다. 그러다가 문득 다른 세계에서 온 자기 자신과 만나면서 이렇게 ‘빨리’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자신의 세계에 스스로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다른 세계에서 온 자신과의 만남 덕분에 에른스트 모는 자신, 자신의 세계와 거리를 두게 되며, 그렇게 빠르게만 돌아가는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당연하다고만 여기고 있었던 자신의 모습, 그리고 이 세계에 질문을 던지는 순간 자신의 모습과 세계는 다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런 거리 두기는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말한고 발터 벤야민이 강조했던 사회적, 정치적인 힘을 가질 수도 있고, 지그문트 프로히트가 보여줬던 것처럼 치유의 효과를 지닐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는 해답은 넘쳐나지만 질문이 사라진 사회에 살고 있다. 온갖 콘텐츠가 “이게 답이다”라고 외치지만, 왜 이 답이 필요한지, 왜 소비해야 하는 필수 재인지에 대해서 묻는 사람은 없다.
‘왜’라는 질문이 부재한다면 근본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감정에만 매몰돼 있을 수밖에 없다. 인문학은 그런 우리에게 끊어서 보는 기술을 가르쳐준다. 문장에 쉼표가 필요하듯, 생각에도 쉼표가 필요하다.
인문학은 아무리 복잡한 문제라도 하나하나 잘게 나누고, 끊어 보고, 되새김질하는 법을 알려준다. 마치 요리를 위해 재료를 다듬는 것처럼 인문학은 내 감정과 경험을 잘게 썰고, 삶을 되짚을 수 있는 도구다.
그렇기에 방금 언급했던 거리 두기의 효과보다 중요한 건 거리 두기를 통한 질문 자체의 힘이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 질문자는 ‘자아 없이 진지하게’ 살아가던 자신의 모습, 시간을 중단(끊어 보고)은 동시에, 질문의 내용 (경험, 사회, 정체성 등)을 분석(잘게 썰고)하고, 반성(되새김질)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구축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접한다는 건, 매 순간 이런 행위를 통해 자기 스스로, 자기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든다는 이야기이다. 정체성은 만들어진 순간 가장 강력하며 시간이 갈수록 잊히기 마련이지만,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 정체성을 다시 구축해야 한다.
무엇보다 인문학은 인간이 경험해 왔고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서사를 품고 있다. 문학은 타인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조명하게 하고, 철학은 모든 것에 물음표를 던지며 ‘개념’이라는 틀을 가지고 논리를 전개한다. 역사와 예술은 시간과 공간 감각을 회복시킨다.
이 모든 건 고립된 나를 더 넓은 세계와 연결해 주며, 스스로 연결을 만드는 가운데 나만의 기준과 방향이 생긴다. 그렇게 인문학은 인생의 가이드가 되며 더 나아가 삶을 더욱 단단하게 하는 연마제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문학적인 사고를 통해 만들어진 나는 소위 말하는 속세의 의견/가치관이 나를 비난할 경우에도 굳건히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를 통해 말하자면, 정신에도 좋은 음식이 필요하며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우리가 굳이 유기농 식재료를 찾아 먹는 이유는 빨리 먹기보다는 몸을 더 건강히, 가능한 한 더 오래 튼튼히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유기농 식품은 패스트푸드의 쓸모보다는 더 큰 쓸모를 지향한다. 인문학은 인공 조미료처럼 달콤하진 않지만, 오래도록 내면을 지탱하는 근본 영양소를 머금고 있다.
앞서 말했듯, 혈당을 급하게 올리는 음식을 먹으면 그만큼 빠르게 허기진다. 혈당 스파이크라고 부르는 음식이 바로 그렇다. 지금 우리가 소비하는 영상, 뉴스, SNS도 마찬가지다. 잠깐은 자극적이고 유쾌하지만, 금세 허전해진다.
그래서 정신에도 저혈당 음식이 필요하다. 조금 지루해도, 조금 덜 자극적이어도, 천천히 속도를 높여주는 것… 우리가 인문학 저서를 읽고, 질문하고, 되새겨야 하는 이유다.
*다음 주부터는 금요일 1회 연재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