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힘이 인간 정체성과 인간성을 지키는 이유
"나는 왜 사는 걸까?", "무엇이 옳은 삶일까?", "나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들은 누구나 한 번쯤 사춘기나 인생의 변곡점에서 마주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삶이 버거울 때 가장 본질적인 질문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가장 혼란스러웠던 그 시절, 나 역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흔들렸고, 철학과에 진학하고 싶었던 적이 있다. (결국 철학과 석사까지 했긴 했다.)
자기 정체성 확립과 사회에 대한 물음은 효율과 실용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인간의 삶 자체가 본래 효율적이지도 실용적이지도 않다. 삶에서 우리는 때때로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며 작은 말 한마디에 나를 희생하기도 한다. 이러한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도 중의 하나가 인문학이다.
인문학의 본질은 질문이다. 철학은 존재와 진리를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무엇을 알고 있는가?”라는 단순한 질문으로 아테네 시민을 혼란에 빠트렸고 끝내 독배를 마셨다. “과연 나는 나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라는 오래된 물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과연 나는 나 자신을 알고 있는가? 내가 선택하는 삶은 진정 나의 의지인가?
문학도 마찬가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구체적으로 ‘책임’, ‘벌’, ‘구원’, ‘신’ 등의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고,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야기를 통해 ‘역사’, ‘국가’, ‘침묵’, ‘증언’ 등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이런 방식으로 문학은 답이 정해지지 않는 혹은 않은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삶을 껴안으면서 독자가 스스로 여러 가지 질문을 제기하도록 만든다.
역사학으로서의 역사도 질문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통해 오늘을 성찰하고 미래를 준비하려는 인간의 의지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왜 이 전쟁을 기억해야 하는가?”, “과거의 잘못은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책임을 요구하는가?”라는 물음이 역사학이 전제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역사학은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닌,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조명한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는 사유의 연대기다.
질문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내면의 뿌리도 깊어진다. 취향은 개인성을 나타내는 가장 순수한 영역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취향은 단 한 번도 순수했던 적이 없었다. 항상 타인과 사회의 권유에 설득되어 왔던 것이 취향이며, ‘소비사회’에 접어들며 더욱더 귀가 얇아졌던 취향은 AI 시대로 들어오면서는 아예 귀가 사라지고 있다.
어떤 순간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나의 취향인지 아니면 알고리즘의 취향인지 헷갈릴 정도로 알고리즘은 우리의 관심사와 취향을 결정한다. AI 시대에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AI 시대에 등장하는 혹은 필연적으로 제기되어야 하는 질문인 이유이다.
사실 이런 답도 없는 인문학적 문제 자체는 사회, 정치적인 문제의식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예전에 아는 지인으로부터 군대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사학과 재학 중에 입대를 했다가 훈련소에서 다른 몇몇 동기들과 함께 어디론가 불려 갔다고 한다.
그러더니 누군가가 “사학과, 철학과, 국문과 등등은 빠져!”라고 해서 자기도 빠졌는데 알고 보니 거기 모인 사람들은 당시 기무대로 차출될 후보였다고 굉장히 아쉬워했다. 기무대 후보에서 제외된 관들은 대부분 답이 없는 질문을 제기하는 과이므로 기무대에 어울리지 않기에 군에서는 제외한 게 아닐까? ‘왜 지금 평등하지 못한가?’, ‘왜 침묵을 강조하는가?’ ‘왜 억압이 정당화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던 인문/사회 서적은 독재 정권에서 금서로 배제되기도 했었다.
과거의 그들이 두려워했던 건 ‘지식’보다는 ‘질문 제기’ 자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본질적인 물음은 사회를 변화 시킴과 동시에 사회를 진동하게 한다. 계속 현 상황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권력들은 이런 사회적 진통이 반갑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유명한 영화 ‘타짜’에서 악역으로 등장하는 ‘짝귀’가 이런 말을 한다. “상상력이 많으면 그 인생 고달파!” 비판이 사라지고, 질문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어쩌면 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른다.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력 없이 현체제에 순응하고 잘 살기만 원한다면, 사실 인문학은 거추장스러운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어른이 될수록, 나이가 먹을수록 삶이 바쁘다는 이유로 책을 멀리 하고 인문학과 떨어져 지내는 데는 이런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답이 없는 질문을 계속하고 답을 찾아가는 건 생각보다 실용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을 사랑하기 시작하는 시기가 내면의 진통이 있는 사춘기인 이유도 인문학이 내 안의 진통을 함께 견뎌주는 진통제 같은 학문이라서 일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쓸모없는 물음들은 우리의 내면의 확장에 기여한다. 나이가 들수록, 살기 위해서 운동을 한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근육이 빠지기 때문에, 더욱더 꾸준히 운동을 해야 한다. 운동을 열심히 해서 한 순간 좋은 몸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운동을 다시 게을리하고 술, 담배를 가까이하면 몸은 근육질에서 다시 지방질로 바뀐다. 인문학은 몸을 지탱하는 근육 같다. 운동을 그만 두면 근육이 빠지듯 가만히 있으면, 생각하지 않으면, 질문하지 않으면 인문학이 만들어온 내면의 근육은 다시 빠져 버린다.
인문학이 세상살이에서 받는 크고 작은 충격을 완화하는 역할을 하듯, 생각하는 걸 오래 멈추면 세상살이에 대항할 힘이 없어지기도 한다. 운동을 할수록 근육이 찢어지면서 더 큰 근육이 되는 것처럼, 그리고 거기에는 육체적 고통이 따르는 것처럼, 머리가 아프더라도 그리고 삶이 지치더라도 질문을 계속하고,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의 정신도 더 단단해진다.
바쁘고 숨 막히는 생활로 피폐해진 나의 마음을 시간을 내어, 다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건강한 마음엔 감기가 들지 않는다. 고통스럽지만 질문해야 한다. 고통스럽지만 생각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만 모든 게 쉬워지고, 원하는 모든 정답을 찾을 수 있는 AI시대에 인간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렇게 찾은 정신적 건강함만이 AI시대에 나를 지키고, 인간을 지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