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 회복시킨 나의 자존감

쉼을 두려워하는 우리에게 인문학이 전하는 메시지

by 발가락꽃


우리가 쉼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전부터 우리에게 긴 쉼은 고통을 의미했다. 내가 아이였을 때 어른들에게 들었던 말 들 중 기억에 남는 말은 “죽으면 어차피 쉬는데…”이다. 비단 한국어 표현만은 아닐 것이다.



영어로 고인을 애도하는 문구 중엔 “Rest in peace”, “Rest well, you will be missed” 등 쉼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구가 많다. 문화를 막론하고 삶은 일하는 것, 움직이는 것인 반면, 죽음은 쉬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는 생각, 의지를 반영하기도 하지만, 인식을 무의식적으로 형성하기도 하다. 생각의 틀, 구조가 언어에 의해서 규정되기도 한다는 의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쉼 자체가 불안, 고통 그리고 죽음과 닮아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쉼은 일이 없다는 의미이며 그래서 실패를 의미한다. 쉼이 하나의 활동이라면 의미 없는 활동이며, 실패한 일이며 언제나 할 수 있는 일, 그래서 나약함과 나태함을 내포한다.



이런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쉼을 절제한다. 예를 들면 쉴 때 불편하고 불안한 느낌을 받는 사람이 많다. 자신만 도태되고 있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매일 접하는 미디어에서는 오늘도 어떻게 열심히 살아가는지, 그래서 얼마나 보람됐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만일 오늘 하루 편하게 쉰다면 쉰 만큼 무너지는 느낌을 받는다.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자. 나에게서 쉼이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있는가?



과학적으로 본다면 인간은 쉬어야 하며,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한다. 뇌 과학자/수면전문가인 매튜 워커는 하루 7시간 이상은 수면을 취해야 정상적인 뇌와 몸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으며, 하루에 6시간 이하의 수면을 취하는 사람은 면역력 저하, 기억력 감퇴, 심장 질환 위험 증가, 감정 조절 실패와 같은 문제를 겪게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예전엔 잠자는 시간도 아껴 자기 계발을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요즘은 잠의 중요성에 대해서 인식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잠을 자지 않으면서 쉬는 시간은 버리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아까워하는 사람은 많다. 깨어 있는 자투리 시간은 영어단어 하나라도 외워서 본인 개발을 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어떻게 보면 잠은 물리적인, 생리적인 쉼이다. 잠을 통해 뇌와 신체는 내일을 살기 위한 준비를 한다. 하지만 잠으로 다 회복할 수 없는 정신의 영역이 있다. 정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선 바쁜 삶의 여정 속에서 잠시 내려와 스스로를 돌아보고 점검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 인문학이 마련한 유산이 있다. 우선 인문학은 굳이 다른 사람들처럼 무리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며 모두 다 동일하게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회가 제시하는 삶의 기준이라는 것은 상대적이며 임의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그래서 남의 평가에 휘둘리면 안 된다는 걸 알려준다.



주체라는 개념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푸코, 들뢰즈, 데리다 같은 소위 말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계통의 철학자들이 강조하고 싶은 것도 어쩌면 주체성이 아닐까? 여하튼 인문학은 나의 자존감은 남과의 비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고 다듬으며 세워진다는 걸 알려준다.



그리고 인문학은 스스로를 깊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철학, 문학을 접하면서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 감정, 갈등, 성장 등에 대해 깊이 있게 성찰하고 생각하게 된다. “화났어”, “기뻤어” 같은 감정의 표면적인 인식에 멈추지 않고 감정의 깊은 근원을 인식하려 노력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다음에도 나의 화가 정당한지 혹은 내가 오늘은 유독 예민했는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이런 이해는 자기에 대한 수용으로 이어지기에, 나 스스로를 못난 사람이 아닌 그럴 수도 있는 한 개인으로 보게 되며, 자연스레 자존감이 생긴다. 자기 스스로를 이상화하지 않고 지금 여기 숨을 쉬고 있는 한 개인으로 본다면 나의 모자람도 덜 부끄럽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인문학은 다양한 삶을 조명한다. 잘 사는 사람, 잘 생긴 사람, 똑똑한 사람은 아니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오히려 모두들 이상적인 인간이 아니기에 더 가치 있고 아름답다는 걸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모두가 생각하는 완벽한 틀에서 벗어난 다양한 방식의 가치를 이야기하며 존중하게 한다. 어떻게 보면 다양함이 있기에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는 것 아닐까?



다양한 가치를 토대로 스스로를 인정하며 다독이고, 마찬가지로 타인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수용성을 기르게 하는 것이 인문학이며, 더 나아가 나와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한 발자국 밖에서, 즉 전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쉼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멋진 삶을 SNS에서 보기보다는 조금 더 심연의 모습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이다. 모든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말이 있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젊던 늙던, 부자던 가난하던, 예쁘던 못생겼던 각자 가지고 있는 비극이 있고, 자신만의 고통, 번뇌가 있다. 모든 것에 만족하는 것만큼 죽음과 가까운 것은 없을 것이다. 그건 어떤 것도 바꿀 힘도 의지도 없다는 의미이며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각자가 지닌 그리고 세상이 지는 비극을 알고 헤쳐 나가려면 힘과 도구가 필요하다. 나에게 이 도구는 바로 물음표라는 곡괭이이며, 파헤치는 힘은 바로 쉼에서 나온다. 다시 말하면, 인문학은 세상을 대하는 나만의 도구이며, 때로는 남의 시선에서 나를 보호해 주는 단단한 갑옷이 되어주기도 하며, 때로는 날카로운 곡괭이가 돼주기도 하고, 때로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는 영양 보조제가 되기도 한다.



인간은 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쉬어야 한다. 인간은 잠이라는 육체적인 쉼을 제외한다면 일하지 않는 다른 모든 쉬는 시간을 견뎌야 한다. 이 쉼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렇지만 어떻게 쉴지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며 고민해야 한다. 어떻게 쉬느냐에 따라 내가 ‘나 자신’ 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도, 못 찾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쉼 안에서 스스로 회복하고, 자존감을 찾아야 한다. 이것은 내일의 나에게 오늘의 내가 줄 수 있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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