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삶을 성찰하는 인문학의 힘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타인의 시선이지 않을까? 타인의 시선이 두려운 이유는 그 시선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누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기준으로 나를 보고 있을지 결코 알 수 없기에 나는 끝없는 불안과 상상의 조율 속에 놓인다. 사르트르도 비슷한 이유로 타인의 시선이 지옥이라고 했었다. 어딘가를 통해서 나를 보고 있을 시선은 불안함을 넘어 수치심마저 느끼게 한다고 그는 얘기했다.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건 다른 사람과 함께 속한 세계이며, 출생 후 아기는 계속되는 만남이란 이름의 사회화를 거친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철이 들고 단 한 번도 자유로웠던 적이 있었나? 나는 없었다.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사람들은 처음 가지고 태어난 욕구인 원초아, 이를 감시하는 초자아, 초자아를 만족시키며 조율 속에서 태어난 자아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원초아는 욕망덩어리이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속 엄마라고 하는 초자아는 계속 나를 감시하며 세상과 조율하도록 한다.
남과 함께 있지 않아도,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지 않아도 마음속에서 오는 통제의 원천이 바로 초자아라고 한다. 그러니까 마음속에 제삼자가 있는 것이다. 나를 계속 감시하는 초자아는 남보다 나의 욕구나 나의 잘못들을 더 자세하고 깊숙이 알고 있다. 하지만 보통 현실 세계에서도 누군가가 초자아처럼 나를 지켜본다고 생각한다. 사실 초자아의 형성 자체가 부모님(가족), 학교(친구, 선생님)들이 바라보는 시점을 토대로 형성되기 마련이다. 이처럼 초자아의 시선과 타인의 시선은 닮은 점이 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어렸을 때 꽤 부유한 동네에 있었다. 모든 친구들이 브랜드 티셔츠를 교복 안에 입고 다녔는데 하루는 누군가가 브랜드가 없는 옷을 입고 온 친구를 놀린 일이 있었다. 나는 그날부터 브랜드가 없는 내 옷을 들킬까 봐 교복 단추를 끝까지 잠갔다. 지금 생각하면 참 별것 아닌 일이긴 한데 그때는 달랐다.
13살의 나에게 그건 ‘존재의 죄’였고, ‘부끄러움’이란 이름의 낙인이었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산 만 원짜리 옷도 당당하게 입고 다닌다. 이렇게까지 당당할 수 있는 건, 내가 그 일에 대해 다시 생각했고 나 스스로 수치심의 이유를 찾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이유를 찾지 못했고, 스스로 생각하지 못했다면 13세의 에피소드가 남긴 상처는 지울 수 없는,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트라우마가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커 가면서 타인의 선택을 존중할 수 있게 되었고, 그만큼 내 선택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브랜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난 브랜드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 즉 나에겐 브랜드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는 힘을 키워준다. '왜 사는가', '왜 이렇게 느끼는가', '왜 세상은 이래야만 하는가'라는 질문들을 던지면서, 우리가 외부의 기준에만 매달리지 않게 해 준다. 인문학을 접하면서 사람들은 무엇이 가치 있는지, 무엇이 더 중요한지 구별할 수 있게 된다. 이토록 바쁜 일상에서, 그러니까 왜라고 근본적인 질문보다는 무엇을 할 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한 삶에서 인문학은 ‘삶의 실용성’ 자체에 의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지?’라는 생각만으로 하루를 채운다. ‘오늘 뭐 먹지?’ ‘이번 주말에는 무얼 하지?’와 같은 질문들이 바로 그것이다. 잘 생각해 보면 이런 질문들은 대부분 외적이 것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즉, 사회가, 직장이, 타인이 요구하는 그 ‘무엇’을 해내기 위해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런 외부의 요청으로 가득 찬 삶에, 인문학은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한다. 그리고 묻는다. “너는 왜 그걸 하려고 하는가?”, “그 일은 너의 진정한 삶과 맞닿아 있는가?” 무엇을 한다는 건 미래 지향적인 행위이지만, ‘왜’라는 질문 자체는 뒤로 가는 행위이다. 반성(reflexion)의 행위는 내가 놓쳤던 것을 다시 파악하고 근본을 파헤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육체의 쉼 뿐 아니라 정신의 쉼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 마음이 다급하고 남과의 경쟁에서 앞서야 된다고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국 경주 속 경주마로 밖에 살아갈 수 없다. 남보다 못하면 지는 것이고 쓸모없는 것이다.
하지만 솔직하게 본인을 돌아보자. 자기가 혹시 조랑말이나 라마는 아닌지… 경주마가 아님에도 경주장에서 뛰고 있는 건 아닌지… 나는 나만의 쓰임이 있고 나만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건 바쁜 일상에 틈을 내지 않고, 삶의 연속성을 끊어내지 않는다면 볼 수 없는 질문이며, 따라서 알 수 없는 답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내가 남보다 못한 게 아니라 남과 다른 건 아닌지… 그들은 그들의 삶이 있고 나는 나의 삶이 있다. 이런 성찰이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인문학이다.
주변을 둘러보고 나를 바라본다면 나만의 가치를 사회에서 강요하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을 수도 있다. 예컨대 나는 조용한 들꽃이라 남의 눈에 띄진 않지만 수많은 친구들을 가진 편안한 사람일 수도 있다. 주목받기보단 함께하는 삶을 택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들꽃에게 왜 너는 꽃집에 들어가 비싸게 팔리지 못하냐고 하는 사회에 본인의 가치에 대해서 증명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 스스로는 납득시켜야 한다. 그래야 ‘잘’ 살아갈 수 있다.
“왜 공부를 하는가”, “왜 일을 하는가”, “이것은 왜 정의롭지 못한가”와 같은 사회에 대한 물음부터 “왜 난 아파하는가”, “난 무엇을 하고 싶은가”, “왜 나는 사랑하고 싶은가” 같은 개인에 대한 물음까지… 이런 물음은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 줄 뿐만 아니라,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잊고 있었던 진리를 되찾게 해 준다. 타인, 사회의 기준을 살짝 밀어내고, 나만의 기준을 세울 용기가 생기는 것도 이런 질문에서부터이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타인과 살아간다. 하지만 타인은 내가 아니며 나를 찾아야 하는 건 나만의 숙제이다. 인문학은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 오래됐지만 여전히 유효한 지도이다.
진짜로 중요한 질문은 ‘왜’이다. 그리고 ‘왜’를 묻는 용기가 생길 때, 비로소 누군가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남이 보는 내 삶이 아니라, 내가 들여다보는 내 삶. 그것이 나를 진짜로 살아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