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감각을 회복시키는 비타민

예술, 그 감각의 미학으로

by 발가락꽃

예술은 무엇일까? 예술을 정의한다는 건 참 힘든 일이다. 정의되지 않는 것 또한 예술의 특성 중 하나일 정도이다. 그럼에도 예술의 가장 큰 특성 중 하나는 예술이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을 섬세히 표현한다는 것이다.



언어는 구체적이고 체계적이다. 하지만 모든 언어에는 틈이 있다. 예를 들자면 ‘사랑해’라고 표현하는 감정이 있다.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나는 애인을 사랑한다.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이 모든 문장에 ’ 사랑하다 ‘가 있다. 하지만 이 세 문장에서 ‘사랑한다’의 의미가 다르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모두 동일하게 사랑한다는 감정으로 표현한다.



철학에서 플라톤이 ‘이데아’라고 표현한 것이 ‘사랑’의 본질이며 후에는 이걸 ‘보편자’라고 이야기했다. 즉, ‘사랑’이라는 이름의 ‘이데아’가 있으며 이게 바로 ‘사랑’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언어는 이 보편자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언어의 보편성이 바로 언어가 가지는 틈이다.



언어를 통해 무언가를 지칭할 수는 있지만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 모든 감정은 각기 다 특별하며 우리는 다양한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기 전에 섬세히 느끼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런 틈이 있는 언어를 도구로 무언가를 완벽히 표현한다. 그래서 시인은 예술가라고 한다.



예술은 감각들을 연결하는 신경 세포 같은 것이다. 언어라는 틀에 가두어 넣어 전달하기 힘든 것을 예술은 즉각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 ‘왜 나는 이것을 거부했나’, ‘왜 나는 이게 좋았나’와 같은 질문들은 무언가를 감각, 지각한 이후에 하는, 행위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하는 질문들이다.



철학자 베르그송의 책 중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이라는 책이 있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감각, 감정은 언어 이전에 바로 주어진, 우리가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베르그송의 표현을 따르자면 공간적인 것으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느끼는 즉각적인 감정이 바로 그런 것이다.



언어의 이런 부정확성은 외국어를 배우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내가 느끼는 세세한 감정을 서양의 언어로 표현할 때마다 난 난감함을 느낀다. 즉 어휘의 선택지가 그렇게 다양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물론 서구의 언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도 이런 경험이 있다. 이번에는 역으로 한국어의 선택지가 다양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많은 학자들이 언어는 사고의 틀이라고 강조한 것처럼 언어는 사고방식을 좌우한다. 그래서 언어의 차이에서 비롯된 인식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그렇지만 외국어를 배우고, 외국인과 친구가 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건, 각 개인의 감정은 서로 다 다르지만 동시에 사람의 감정이란 생각보다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한국어로 번역된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읽고 여러 가지 감정이 올라오는 건 그래서이다. 결국 감정이란 언어와 독립적이라는 이야기이다.



예술가도 우리처럼 사회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다만 자신이 사는 사회 안에서 보고 느끼고 들은 것을 자신만의 고유한 표현방식으로 전달할 뿐이다. 예술적 표현이란 보통 언어를 초월하기에, 부수적인 설명이 없다고 해도 사람들은 작품을 보며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관객의 공감이란 즉흥적인 동시에 직설적이다.



예술가들이 표현하는 깊은 감정들을 우리는 보통 삶에서 자주 경험하지는 않는다. 특히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다들 사회 안에서 그럭저럭 잘 살아가기 위해, 일차원적인 감정을 드러내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하물며 그 분노도 계산된 분노일 경우가 많다. 감정을 느끼는 능력은 점점 무뎌져가다가 어느 순간 고장 나 버린다.



산에 올라가 ‘야호’ 하고 소리를 지르면 속이 뚫리는 걸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가끔은 속에 묵은 감정들이 나올 수 있는 구멍을 뚫어줘야 한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가 미적경험(aesthetic experience)이다. 미적 경험이라는 건 단순히 예쁜 걸 보고 ‘좋다’라고 느끼는 걸 넘어서, 그 순간의 분위기, 색감, 소리, 공간감 같은 모든 감각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마음의 감정이 자극되고 온몸이 흔들리는 경험이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어떤 장면 앞에서는 숨이 멎듯 멈춰 서게 되거나, 갑자기 가슴이 울컥해지는 바로 그 순간이다. 감각이 예민하게 열리고, 생각이 멈추고, 감정만이 또렷해지는 시간, 이건 꼭 예술 작품 앞에서가 아니라도 경험이 가능하다. 빛이 예쁘게 스며드는 오후의 창가, 웅장한 자연의 풍경, 혹은 아주 오랜만에 듣는 옛 음악으로도 가능하다. 중요한 건, 그 순간만큼은 어떤 이성적 판단이나 가치관을 뒤로하고 우리의 감정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방금 언급했듯 이런 미적 경험은 웅대한 자연이나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도 가능하다. 순간적으로 현실과 단절되며 나의 감각에 집중하는 그 순간 무언가 숭고한 것을 만난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예술 작품 앞에서의 미적경험과는 다른 점이 확연히 존재한다.



자연 풍경이 주는 경외감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선택도 없다. 멋진 풍경은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압도감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는 누구나 어린아이가 된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 낸 작품들 중에는 내 마음에 드는 것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다.



또한 어떤 작품 앞에서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다른 작품 앞에서는 느끼기도 한다. 예술 작품은 자연처럼 경외감, 숭고함, 압도함 같은 힘만 지니지 않는다. 거기서 나는 선택을 할 수 있으며, 나의 취향에 따라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처럼 난 예술 작품을 선택한다.



그래서 칸트는 자연의 숭고함을 모든 측량 가능성을 뛰어넘어 나를 압도하는 힘, 경이로움과 찬 탐함이 섞인 감정으로 묘사한 반면, 예술의 아름다움을 질서, 조화, 유한한 형태가 주는 완벽함으로 묘사했다. 한쪽에는 인간 기능(오성, 상상력)의 자연스러운 조화가 있는 반면, 다른 한쪽에는 자유로운 일치가 있다는 것이 칸트의 말이었다.



다시 말하면 예술 작품 앞에서 인간 기능의 자유로운 일치는 어느 정도까지는 관객의 태도에 달려 있다. 물론 예술 작품이 훌륭해야 관객의 이런 태도를 이끌어내겠지만, 그래도 관객의 자유와 취향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 어떻게 보면 취향이란 칸트가 말한 “자유로운 일치”에 있는 게 아닐까?



게다가 인간이 만든 예술 작품들은 우리를 다시 한번 사회의 문제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미적경험 당시에 관객은 이성과 차단된 순수한 감정의 세계에 있지만, 경험이 끝난 이후엔 우린 다시 이성의 세계로 온다. 관객은 다시 자신이 방금 했던 경험을 되돌아보는 동시에 작품의 메시지를 해석, 이해하려고 한다.



그렇게 아티스트가 남긴 의식적, 무의식적 메시지는 아티스트가 속했던 사회,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문제까지 연결되기도 하며 그렇게 관객의 미적 경험은 실존, 사회에 대한 물음표로 연장되기도 한다. 반면 자연경관이 주는 미적 경험은 이런 후속 작업이 많이 없다.



요컨대 예술은 미적 경험이라는 수단을 통해 나, 그리고 내가 속한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감정을 통해 이루어진 이상, 반성(reflexion)의 힘은 언어로 이루어진 것보다 강력하다. 왜냐면 우린 그 안에서 감정으로 된 주체할 수 없는 열 덩어리를 ‘감동’이란 이름으로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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