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놀이에서 근원을 찾다.

예술과 놀이가 만들어내는 몰입의 세계

by 발가락꽃

예술은 일종의 놀이이다. 인간이 무리를 지어 생활을 할 때부터 예술적인 활동을 한 것처럼, 아기는 첫걸음을 떼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자연적으로 예술 활동과 비슷한 행위를 한다. 가령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북을 두드리기도 하는 등 몸을 움직인다. 이런 행위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단순히 그 몸짓이 즐겁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예술의 기원은 ‘즐거운 행위’에 있으며 그렇기에 일종의 놀이이다.



놀이는 즐거워야 한다. 그리고 즐거움은 언제나 자발성을 전제한다. 내 의지로 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놀이 안에는 언제나 규칙이 있다. 놀이의 규칙이란 사회와는 동떨어 져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가끔은 이해가 되진 않지만, 그래도 놀이 안에서는 허용이 된다.



당연히 놀이의 규칙들은 참여자가 놀이에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 아무런 구속력도 가지지 않는다. 그리고 놀이를 구성하는 구성원들도 이 규칙을 자율적으로 수용하지만 규칙을 따르기 싫을 땐 언제든 빠져 나 올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놀이에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놀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놀이 안에서 삶과는 다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놀이는 아무런 현실적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지만 모두들 놀이를 할 때는 진지하며 최선을 다한다. 놀이가 예술의 형태와 같은 이유이다. 문학 작품을 대할 때, 영화를 볼 때, 우린 이것이 만들어 낸 이야기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야기를 충실하게 따라간다. 누군가 이것을 보고 독후감을 쓰라, 영화 비평을 하라는 임무를 준다면 우린 아마도 허구의 세계에 몰입하기보다는 해야 할 업무에 초점이 맞춰져 본질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가장 흥미로운 예술은 연극이다. 주지하듯 연극은 실제와 닮아있으면서도 다르다. 그래서 과장된 몸짓이나 딱딱한 말투를 보면 ‘연극 같다’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연극이 펼치는 이야기에 감동받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허구라는 것을 아는데도 말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에선 모든 게 사실적으로 연출된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영화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태도조차 실제 사회와 양상이 다르다. 관객이 관람하는 형태를 관찰해 보자. 관객은 영화관으로 가서 스크린을 마주 보고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앉아 감독이 편집해 놓은 것을 보고 있다. 영화 내부와 외부 모두 실제 삶과 거리가 있다.



미술이나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미술 작업이 묘사하는 풍경, 이야기, 그리고 음악이 느끼게 하는 감각 역시 어떻게 보면 실제의 삶이 아니다. 관객은 아티스트의 삶을 순간적으로 느끼기도 하며,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자면, 존재가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런 미적 경험의 순간 관객은 자신이 속했던 세계가 아닌 어떻게 보면 ‘허구’의 세계를 살게 된다. 어떻게 보면 몰입의 경험이기도 한 미적 경험의 순간은 관객만이 느끼는 특별한 경험은 아니다. 예술 경험의 주체가 되는 아티스트들(미술가, 음악가, 무용가, 작가등 모든 예술 창조 직종의 사람들)도 이런 순간을 경험한다. 작품 활동을 하는 아티스트라면 본인의 몰입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티스트는 작업을 할 때 자기의 작업과 물아일체를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예술이 선사하는 세계는 현실과 맞닿아 있지만 그럼에도 현실과 동일하지 않은 가상의 세계다. 즉, 무언가에 몰입하여 그 안에서 재미있게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세계이다. 예술의 경험, 특히 집중이 놀이에서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허구의 세계인줄 알면서도 집중하며, 그 집중 속에 물아일체의 경험을 하는, 작품 속의 인물이 되는 관객은 이 경험에 도취되어 흥분하기도 하고, 눈물 흘리기도 하며, 즐거워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놀이가 끝난 후, 즉 몰입과 집중이 끝난 후 돌아온 현실 세계는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진지하게 살아온 세계, 그럭저럭 잘 돌아가던 세상은 이젠 무언가 삐걱거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니콜라 브리오(Nicolas Bourriaud)라는 프랑스 비평가는 이를 ‘틈’이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연속적으로 진행되던 삶에 틈을 만들어내는 것, 이게 바로 예술의 힘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틈’을 만들어냄으로써, 예술은 현재를 환기시킨다. ‘틈’이 생기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 단순하게 내가 무언가에 몰입한다고 해서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 생기진 않는다. 집중해서 게임을 하거나 쇼츠를 봤다고 이런 삶의 공간이 생기진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삶의 연속성을 끊어주는 틈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창조가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토대로 다른 세계를 마주 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창조는 단순히 예술가의 활동만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예술 작품을 대하면서, 그러니까 작품을 해석하면서도 창조가 일어날 수 있다. 물론 사람들은 예술가의 의도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고, 굳이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내가 나의 온 지식, 그리고 풍부한 감정을 동원해 예술 작품을 대할 때, 그리고 해석할 때 창조가 일어날 수 있다. 해석하면서 새로운 규칙을 작품에 적용하며, 그렇게 난 예술의 가능한 하나의 해석을 만들게 된다.



일반적인 놀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의 놀이를 보면 관찰해 보면, 놀이 중에 상대자와 조율하면서 놀이의 규칙을 계속 바꾸는 걸 볼 수 있다. 놀이 안의 룰은 실제 세계를 구성하는 것들과는 관련은 없다. 반면 놀이 안에서는 끊임없는 규칙의 조율이 있고, 재미있게 그리고 잘 놀기 위해서는 규칙을 지키는 동시에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계속해서 새로운 전략을 짜야 상대를 이길 수도 있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기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놀이를 하는 사람의 능동성만큼 놀이를 재미있게 하는 건 없다.



놀이 규칙의 가변성은 예술 관람에서도 나타난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볼 때가 특히 그렇다. 어떤 특정 그림 앞에서 마음이 동하고, 그림이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줄 때 관객은 이유를 찾기 시작하며 그때부터 놀이 규칙은 바뀐다. 왜 이것이 나를 이렇게 까지 흔드는지 알고 싶어서이다. 만약 내가 찾은 이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계속 다른 이유들을 찾는다. 내가 납득할 때까지 이유를 찾는 놀이는 계속된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우리의 머리는 마음에게 묻는다. “왜 이것이 좋은가?”, “너는 이것에 왜 끌리는 것인가?” 물론 좋은 느낌을 받고, 그 이유를 자문하지 않고 지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칸트가 말하듯, 다들 자기 취향이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라는 느낀다. 내가 어떤 작품이 좋다면 남들도 그 작품이 좋다고 느낄 것이라고 예감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만이 가졌던 이 좋은 감정이 왜 보편적일 수 있는지를 스스로 정당화하려 하다. 그리고 여기서 자신과의 대화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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