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투명함이 여는 새로운 세계

해석의 자유가 만드는 감정의 확장

by 발가락꽃




끊임없이 바쁘게 흘러가는 삶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돌아보거나 남을 헤아리고, 자연의 이치를 고민할 여유를 갖기 어렵다. 예술은 이런 삶에 균열을 만들어낸다. 그 균열 덕분에 우리는 잠시 멈춰 설 수 있다. 예술은 감성을 건드리며 이러한 균열을 만들어낸다. 아티스트의 표현에는 일상의 언어가 설 자리가 없다. 언어의 명석함과 판명함 대신, 모호함이야말로 예술의 가장 큰 특징이다.



예술 작품이 지닌 전략적 모호함은 관객을 더욱 감성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작품에 깊이 몰입하게 한다. 프랑스의 카롤 탈롱-위공 교수는 예술의 이러한 특징을 '불투명함(opacité)'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학자들의 연구 방식을 채용해 작업하는 현대 아티스트가 많아진 지금, 탈롱-위공 교수는 아티스트가 학자가 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를 바로 이 '불투명함'이라는 예술 고유의 특징에서 찾는다.



'은유'는 불투명함의 대표적인 예다. 무언가를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은유나 메타포를 통해 어렴풋이 표현함으로써, 아티스트는 작업에 매력을 더하고, 작품은 그만큼 더 매혹적이 된다.



게다가 예술은 큰 윤곽만을 제시할 뿐 개념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기에, 관객은 예술이 제시한 윤곽을 바탕으로 다양한 해석을 펼칠 수 있다. 같은 음악을 들어도 각자가 지닌 배경과 지평에 따라 서로 다른 추측을 하고 상상을 펼친다. 그렇기에 예술 작품은 관객 수만큼 다양한 해석이 피어날 수 있는 공간이다. 다시 말해, 불투명함 덕분에 예술 작품은 매 순간 관객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다.



예술 작품은 작은 조약돌에 비유할 수 있다. 예술이라는 작은 돌은 내가 살아온 어떤 부분을 자극하기도 하고, 어떤 기억이나 염려를 환기하기도 한다. 조약돌이 물수제비를 뜨며 나아가듯, 예술 작품은 나를 관통하며 엄청난 파장을 만들어낸다.



생각해 보면 낯선 세계와의 만남은 대부분 불편하지만, 그만큼 나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계속해서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 필요한 이유다. 그리고 예술 작품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자신이 가진 '불투명함'이라는 특징을 통해 끊임없이 아티스트들의 세계를 소개한다.



그렇게 우리는 모차르트만의 경쾌한 세계, 반 고흐만의 외로운 세계를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의 인격을 풍요롭게 가꿔나간다. 요컨대 돌이 물과의 마찰을 통해 아름다운 물수제비를 만들어가듯, 예술 작품은 '나'라는 개인과 만나며 '나'를, 더 나아가 예술 작품과 '나' 모두를 풍요롭게 만든다.



다시 '틈'으로 돌아가보자. 삶과 사회를 돌아보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예술이 선사하는 이 '틈'에서부터다. 아티스트의 세계를 경험하고 나와서 본 나의 세계는 분명 달라져 있을 것이고, 바로 여기서 나의 세계가 문제가 된다.



문제가 된다는 것은 내 세계가 새로운 정치적 의미를 갖거나, 실존적 문제의식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틈 덕분에 나의 세계가 새로운 옷을 입게 되고, 더 나아가 삶 자체가 활력을 얻는다는 뜻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예술의 불투명성이라는 매혹 덕분이다.



작품으로 인한 새로운 세계의 열림이 틈을 만들기 때문에, 작품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분명 아티스트는 자신이 속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고, 그 사회 안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그가 만들어낸 세계는 보편적인 세계, 시대를 초월해 접근 가능한 세계다.



지금도 고흐의 작품, 더 나아가 2000년 전의 작품을 보며 감동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비슷한 맥락에서 과거의 작품을 보고 소화해 자신만의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들도 있다. 인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고전은 언제나 시대를 뛰어넘어 자신만의 세계를 전개한다. 예술 작품은 이런 의미에서 보편성을 갖는다. 여하튼 나와 작품을 통해 열리는 아티스트의 세계, 그리고 그 세계와 나의 세계가 충돌하며 틈을 만들고, 이에 따른 두 세계, 두 지평의 융합이 바로 나라는 인간을 풍요롭게 한다.



앞서 칸트의 생각을 빌려 설명했듯, 모두가 취향은 개인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느낀다. 비슷한 이유로 작품의 불투명함 때문에 나는 항상 투명함과 정확성을 추구하며, 예를 들어 작품을 정확히 이해하려 하다가 작품에서 물러나는 순간 다시 작품을 바라본다.



어쨌든 미적 가치란 언어처럼 취향과 상관없이 모두가 공유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관객은 다시 한번 '작품'과 '작품 앞에서의 나'를 정확히 알고자 하며, 이 과정에서 미적 경험이 선사한 '틈'은 한층 더 깊어진다.



작품이 불투명함이라는 매력으로 나를 끌고 간 아티스트의 세계가 나의 세계와 부딪쳐 한 번 틈을 만들었다면, 융합이라는 과정을 통해 이 틈은 메워지는 동시에 나의 세계는 풍요로워진다. 그리고 그 후 냉정하게 방금 전에 만들어졌던 틈에 대해 고민하면서, 나는 '나'에 대해, 그리고 '내'가 속한 세계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많은 철학자가 말한 예술의 정치적 함의는 대부분 여기에서 나온다.



만일 '틈'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삶에 대해 어떤 질문도 제기하지 않고 그저 되풀이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렇기에 예술이 만드는 '틈'은 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성장시키는, 더 나아가 나를 치유하는 균열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기계 속 작은 부속품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 변화할 수 없는 기계와 달리 기계를 변형하고 진화시킬 수 있는 부품이다. '틈' 덕분에 인간은 기계 속 부품이기를 멈추고 기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예술은 이렇게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가능하게 해 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