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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랑 Apr 23. 2024

엄마가 카네이션 파랗게 하래요

제일 까다로운 고객은 가족이다



긴급 발생! 어버이날 작업!


퍼스널 아트의 시작 상품으로 구상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열두 달의 탄생화와 12 간지 동물을 개인에 맞게 매치해서 그리는 포맷이었죠.

동물은 많이 그려보지 않아서 어려웠습니다. 말의 관절 구조를 살피던 중 슬쩍 달력을 봤습니다.

이럴 수가, 곧 맞춤 제작 그림이 필요한 사람들이 생기는 5월입니다.

맞춤 그림은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에 선물로 꽤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어라? 생각해보니 저도 엄마에게 선물을 드리면 딱일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 그림이 샘플이 된다면 딱 좋은 일이지요.


엄마에게 말씀드리니 흔쾌히 승낙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림에 참고하라며 마음에 드는 옷을 입은 사진을 보내주셨지요.


부다성의 엄마. 저 가디건이 마음에 드신대요


조금 의외였습니다.

엄마는 더 비싸고 좋은 옷이 많은데, 굳이 이 옷을 선택하다니…

사진 속 적당한 가격대의 알록달록한 카디건이 의아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엄마의 옷 취향을 몰랐다는 게 새삼스럽게 와닿았습니다.




나도 생각이 있었어


먼저 카네이션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빨간색만 있으면 심심할 테니 분홍색 카네이션도 섞어서 정성껏 그렸죠.

그리고 짧은 글을 위한 공간이 필요합니다.

“엄마, 사랑해요.” 같은 문장들 말이죠.

엄마는 반짝이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아 반짝이 효과도 그려 넣었습니다.


과정샷, 카네이션을 열심히 그렸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지난 패키지여행의 경험이 영감을 주었습니다.

패키지여행을 함께한 어머님들은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나오는 사진을 썩 달가워하지 않으셨어요.

‘배경은 크게, 인물은 작게’를 선호하셨죠.


가끔 얼굴을 크게 찍었을 때는 사진을 확대해서 주름살을 확인하시며 씁쓸하게 웃으시더라고요.

“나도 자기처럼 팽팽할 때가 있었는데 언제 이렇게 변했담.“


그 기억을 떠올리며 엄마의 얼굴은 단순하고 어린 느낌의 캐릭터로 디자인을 하였습니다.

어차피 엄마의 헤어 스타일과 옷을 통해 이 캐릭터가 엄마라는 것은 충분히 전해질 것 같았으니까요.


그리고 배경은 옅은 노랑으로 덮었습니다.

쇤부른 궁전에 갔을 때, 어머님들이 벽에 칠해진 옅은 노란색을 정말 좋아하셨어요.

아마 가이드님의 설명이 한 몫했을 것 같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건물에만 쓸 수 있던, 유럽을 호령하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랑했던 색이라는 설명에

저희 엄마는 물론이고 다른 분들도 저 색으로 집을 도배해야겠다며 까르르 웃으셨거든요.


쇤부른 궁전을 보며 마리아 테레지아 옐로우로 도배하겠단 야망을 품는 엄마의 뒷모습




엄마는 파란 꽃이 좋아


“이건 분명히 엄마 마음에 들 거야!”

자신감을 가지고 의기양양하게 완성된 그림을 엄마에게 전송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고맙다’나 ‘예쁘다’가 아니었습니다.


[전화 언제 되니?]


엄마는 전화를 통해 디테일한 수정사항을 전달하셨습니다.

평범한 <엄마, 사랑해요> 대신에 영문학과 학생(요즘 대학다니시거든요..)다운 문구로, 배경의 노란색도 섬세하게 수정하셨지요.

괜찮습니다. 모두 어렵지 않은 일이에요.


그림의 얼굴에 관해서는 ‘너무 나랑 안 닮은 거 아니야? 내가 이렇게 젊어?’라며 별로인 듯 말씀하시다가,

그럼 주름을 추가하느냐는 의견에 이대로 가자고 하시더군요.


마지막 수정 주문은 카네이션의 색이었습니다.


“엄마는 빨간 옷을 입었잖아. 그럼 꽃은 파란색이어야 엄마가 살지.”

“카네이션은 빨갛잖아요.. 차라리 하얀색으로 바꿀까?”

“엄마는 파란 꽃이 좋아.“


솔직히 여기서 조금 막막하긴 했습니다.

포토샵의 기능으로 색은 바꿀 수 있지만 강제로 강하게 조정된 색은 가장사리가 주변색과 맞지 않아 깨져서 후작업이 반드시 필요하거든요.

무엇보다 저는 카네이션을 그리는데 이틀이나 걸렸다고요.

자세히 묘사했다가 단순히 묘사하기를 반복하며 마음에 드는 색을 한참 걸려 골라냈단 말이에요!


하지만 이 그림은 엄마를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퍼스널 아트입니다.


저는 정신줄을 다잡고 수정을 시작했습니다.

엄마의 마음에 드는 파란 꽃이 나올 때까지요!




사실 이것 땜에 퍼스널 아트


“그것 봐, 엄마가 하란대로 하니까 훨씬 낫지?”


엄마의 만족한 목소리가 블루투스 이어폰을 타고 내려앉았습니다.

맞아요. 파란 꽃이 예쁘더라고요.


수정은 조금 고달팠지만 새삼 이게 제가 ‘퍼스널 아트’라는 걸 하고 싶은 이유였단 걸 느꼈습니다.

누군가를 그린다는 건 기획 단계에서부터 저 혼자만의 작업이 아닙니다.


(부끄럽지만) 거창하게 말하면,

제 세계에 다른 사람의 의견이 들어와서 새로운 융합을 만들어 내는 형태이지요.


예를 들어,

저는 엄마가 아니었다면 결코 빨간 꽃을 배경으로 빨간 옷을 입은 사람을 그리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엄마가 아니었다면, 파란 카네이션을 그릴 상상도 하지 못했겠죠.


만약 누군가를 위한 맞춤 그림, 퍼스널 아트를 계속할 수 있다면 이런 경험들을 계속할 수 있을 거예요.


모르는 것을 배워나가는 학생이 된 기분입니다.

진짜 재밌을 것 같아요.





덧붙임 1.

마지막으로 완성된 그림을 보여드려요!

여러분은 보시기에는 어떠신지 궁금하네요.

주문한 프린터가 도착하면 출력 후 액자에 넣어서 보내드리게요.

(액자도 사연이 많아요... 언젠가 실패한 액자들로 방구석이 가득 찬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해요....)


덧붙임 2.

다행히 친구들 몇몇에게 보여주니, 마음에 들어해줬어요.

그래서 그 애들의 어머니도 그려드리기로 했습니다.

또 어떤 느낌을 받을지, 무엇을 배울지 벌써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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