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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 Dec 02. 2023

어느 미군의 은퇴식

[소방서 다이어리]

Prologue: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을 가감 없이 적어 보려고 합니다. 부디 이 글로 인해 누군가 상처받지 않길 바라며 소통을 통해 내 작은 세상도 더 풍성해 지길 기도해 봅니다.


지난 2년 동안 함께 했던 부 소방서장(Deputy Fire Chief)의 은퇴식을 준비하느라 모두가 분주하다. 행사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소방차들을 밖으로 옮기고 소방서 차고를 임시 행사장으로 단장했다. 소방대원으로 구성된 의장대가 도열해 있고 뮤지션이자 소방대원인 미군이 숙달된 연주로 색소폰을 불며 예행연습을 하고 있다. 


주한 미 공군 오산기지소방서에 온 지도 벌써 18년이 되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은퇴식이 있었고 매번 나의 은퇴식은 어떨지 미리 사전연습이라도 하듯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행사가 시작되고 사회자가 자리에 참석한 VIP들을 소개한다. 교회 목사님의 기도가 이어지고 소방서 의장대가 엄숙한 의식을 진행한다. 이어서 은퇴를 명령한다는 특별 명령서와 공군참모총장, 미 국방부장관, 그리고 대통령의 서명이 담긴 감사장이 전달된다. 지난 26년 동안의 노고에 대한 미국 정부의 예우는 언제 봐도 각별하다.    


시설대대장의 축사가 끝나고 의장대로부터 그동안의 노고를 기념하는 성조기가 부 소방서장에게 전달되면 부 소방서장은 다시 그 성조기를 자신의 가족에게 전달한다. 지난 26년 동안 국가를 위해 봉사하느라 수시로 가족을 떠나 있었으니 오랜 시간 인내하며 자신을 기다려준 가족에 대한 감사의 표시일 것이다.  


이어서 부 소방서장이 지난 26년 동안의 소회를 담담하게 전달했고 그가 준비한 선물과 미 정부의 감사장이 그의 가족에게 전달되면서 대략 한 시간가량의 행사는 마무리되었다.    


은퇴식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감정은 서로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아쉬워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새로운 출발을 향한 기대감에 가득 차 있다. 인생의 황금시기를 소방관이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누군가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준 그의 노고는 치하받아 마땅하다. 


사실 지난 2년 동안 그와의 관계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어릴 적 멕시코에서 나고 자란 그는 입이 거칠기로 유명했다. 가끔 인종차별적 발언도 서슴없이 해 같은 미군들도 당황했을 정도니까. 사적인 대화에서는 물론이고 공적인 자리에서도 F***로 시작되는 말이 빠지지 않아서 불쾌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가 어떤 경로로 미국에 입국했고, 또 어떻게 미군이 되었는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뭔가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듯하다. 하지만 힘들게 살았다고 해서 모두 다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미국에서 부모에게 버림을 받아 다른 가족에게 입양되었다는 또 다른 미군 소방대원은 그와는 정 반대로 말을 아주 예쁘게 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예전에 미셀 오바마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다. “When they go low, we go high.” 이 말을 의역해 보면 "그들이 저급하게 가더라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가자."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나는 왜 그의 은퇴식에 참석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문득 "그래. 개인으로써가 아닌 같은 소방 동료로서 그의 은퇴식에 참여하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참에 그와 관련된 내 안의 해묵은 감정도 함께 은퇴시켜 버리기로 했다. 


부디 그와 그의 가족의 미래에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길 바란다.
(그리고 나의 이 바람은...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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