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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 Dec 01. 2023

일방통행

[소방서 다이어리]

Prologue: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을 가감 없이 적어 보려고 합니다. 부디 이 글로 인해 누군가 상처받지 않길 바라며 소통을 통해 내 작은 세상도 더 풍성해 지길 기도해 봅니다.


영하 5도의 차가운 아침 공기에 졸음이 담긴 뇌가 시리다. 타고 다니던 차를 정비센터에 맡겨 놓은 상태라 오늘은 걸어서 출근해야 했지만 잘 키운 후배 덕분에 따뜻하게 달궈진 그의 차량을 얻어 타고 출근을 했다.


이번에 새로 온 미군 소방서장은 본래 푸에르토리코 태생으로 성질이 매우 급한 편이다. 부임한 지 채 몇 달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바꾸고 싶은 것이 많은 모양새다.


어제는 함께 근무하고 있는 한국 소방대원들의 유니폼을 표준화하자며 자신의 의사를 밀어붙였다. 아무리 직장 상관이라고 해도 이렇게 일방적이어서는 곤란하다.


나는 그의 독주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따져 물었다. 예상치 않은 반응에 그는 적지 않게 당황한 듯 보였다. 보통의 미군들이라면 계급에 밀려 토를 달지도 않고 일을 진행하겠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으로부터 변화의 이유를 요구받으니 화가 날 법도 하다.  


처음엔 규정에 있다며 호기롭게 거드름을 피웠다. 하지만 규정을 찾아보니 마땅한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분명 어디에 있을 거라며 키보드를 검색하는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방향을 잃은 마우스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른다.


보통 미군 소방서장은 일 년의 임기를 받고 한국에 온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렇듯 이번에도 그는 일 년 동안 자신의 업적을 남기려고 작정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심한 피로감을 느낀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실시했던 단기간의 정책들이 소위 ‘뻘짓’으로 판명 나는 일을 무수히도 많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소방관이 입는 유니폼은 임무와 자부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보다 나은 방향으로 유니폼을 표준화하려는 작업은 좋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므로 타당하다면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소통이 되지 않은 일방적 지시는 일종의 폭력이자 억압이다. 누군가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소방관의 사명이라면 그 거창한 대의명분을 실행하기 전에 함께 근무하는 동료부터 먼저 살피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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