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올림픽 D-6 짐 싸기

[나는 도핑검사관이다]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참가기

by 이건

매번 해외에 나갈 때마다 물건을 넉넉하게 챙겨가는 습관이 있다. 불필요한 소비를 막기 위한 것도 있고 또 너무 딱 맞춰 가지고 다니면 불안한 점도 한몫한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여유 있게 담아가야 안심이 된다.


신발만 해도 조깅화, 일반 운동화, 행사용 신발, 그리고 슬리퍼까지 챙기면 네 켤레나 된다. 한 번은 러시아에서 함께 방을 사용했던 룸메이트가 죽 늘어놓은 내 신발들을 보고 깜짝 놀라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밖에도 간식, 비상약, 커피, 텀블러, 친구들에게 선물할 각종 기념품, 태블릿, 보조배터리, 메모장까지 챙기면 어느새 가방은 공간을 잃는다.


“이건 괜히 가져왔나?” 하는 후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짐을 싸고 풀면서 설레었던 마음에 거짓은 없다.


이번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선발대로 도착한 도핑검사관으로부터 카톡이 도착했다. 짐 쌀 때 참고하라며 보내온 사진에는 마치 군대 신병교육소에서 지급받은 것처럼 많은 물품이 담겨있다. 그의 말로는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지급해준 물건보다도 몇 종류가 더 많다고 한다.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도핑검사관에게 지급되는 근무복 일체와 신발


이번 동계올림픽에서는 짐 싸기 전략을 대폭 수정해야 한다. 저 많은 물건을 다 가지고 돌아와야 하기 때문에 미니멀한 짐 싸기가 필요하다.


일단 옷은 입고 가는 것으로 딱 한벌만 챙기고 운동화도 한 켤레만 신고 가기로 했다. 베이징 올림픽 선수촌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의 향이 강해서 먹을 것이 거의 없다는 선발대의 조언에 따라 가방의 남은 빈 공간은 햇반과 캔으로 포장된 반찬, 에너지바, 사발면으로 가득 채웠다. 먹고살아야 하니까…


현지 식당을 이용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베이징을 비롯해 썰매 종목이 열리는 옌칭과 스키 종목이 개최되는 허베이성 장자카우는 모두 코로나 방역을 위해 폐쇄형 루프로 제한되어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오로지 지정된 셔틀버스로 숙소와 경기장만을 오고 갈 수 있을 뿐이다. 자칫 이 규정을 어기면 추방될 수도 있다고 대회 운영 가이드라인이 담긴 플레이북(Playbook)에서 엄포를 놓고 있다.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플레이북


한편 개인위생을 위해 자기 컵 하나씩 지참하라는 조직위 도핑관리본부 안내에 따라 텀블러도 따로 하나 챙겼다.


문득 내가 베이징에 가는 이유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올림픽이라는 세계 최대의 스포츠 축제에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파견되는 만큼 짐도 짐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잘 준비된 업무역량이 아닐까?


정작 중요한 것을 빼먹을 뻔했다. 부랴부랴 세계반도핑기구(World Anti-Doping Agency)의 최신 도핑검사 기준과 선발대가 보내준 베이징올림픽 도핑검사관 매뉴얼을 한데 묶어 책으로 만들었다.


세계반도핑기구와 베이징올림픽 도핑검사 절차를 통합한 나만의 매뉴얼


이제 남은 일주일 동안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진짜 준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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