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세, 캐나다에서 다시 시작
이제 캐나다에 온 지 9개월이 되었다. 마지막 글(열정 없는 5개월 차 워홀러)을 쓴 지 4개월이 지났다. 4개월 동안 뭘 했더라. 일단 일터를 옮겨서 3번째 잡(Job)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 일하는 곳은 베이커리 카페인데, 주문받는 것부터 샌드위치, 크레프(crêpe) 그리고 커피까지 만들어야 한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주문을 받는 거였다. 영어로 주문을 알아듣고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이 쉽지 않아 버벅거리고 실수를 연발해 나 자신이 싫어지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고 모든 것은 익숙해지기 마련인데 왜 그렇게 힘들어했을까 싶다(물론 그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모레인 레이크(Moraine Lake), 드럼헬러(Drumheller), 카나나스키스(kananaskis), 브래그 크릭(Bragg Creek) 그리고 재스퍼(Jasper)도 다녀왔다.
캐나다에 온 지 9개월이 된 시점에서 혹시라도 누가 캐나다가 좋냐고 물어본다면,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라는 말을 하고 싶다. 이 문장은 꽤 유명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 하다. 알고 보니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라는 말은 만화 < 베르세르크 >의 명대사로 꼽힌다고 한다, 본 적 없는 만화의 대사를 들어봤을 정도면 꽤 유명한 거 아니겠나. 혹자는 누가 도망친 곳에서 낙원을 찾겠나,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다는 건 안다. 다만, 낙원을 찾아 도망친 것이 아니라 도망치고 싶어서 도망친 것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에 꽤나 공감이 간다. 일단 나는 낙원은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고통이기 때문이다. 사는 것은 고통이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비교당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남보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뛰어야 하는 것이 고통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다만 조금 천천히 뛰어도, 조금 뒤처져도 괜찮은 곳이 있지 않을까 하여 한국을 떠나 온 것인데, 인생은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자의 문제점은 인생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에 어디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어디에도 낙원은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낙원은 정말 없을까?' 하는 궁금증인지 희망인지 모를 것이 있어 한 번쯤은 어딘가에는 나만의 낙원이 있지 않을까 하고 떠나보는 일을 하고 싶었다. 결국 그 결과가 좌절과 실망이래도 나는 가능성에 대한 미련을 남기기 싫었다. 가능성에 대한 미련. 나는 내가 살 수도 있었던 삶의 가능성에 대한 미련이 가장 무섭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워킹홀리데이를 갔으면 어땠을까?'하는 미련에 사로잡혀 있는 것보다 미련을 남기지 않는 편을 택했다. 캐나다에서의 인생도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깨달았다. ‘나 해외에서도 살 수는 있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