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요, 특기가 방황인가

1년의 갭이어가 내게 남긴 것

by 정민

처음 문경에 왔을 때만 해도 초록초록했던 문경새재가 노랗게 붉게 옷을 갈아입더니, 조금씩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돈을 벌지 않고 나를 탐색하기로 한 1년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는 슬슬 결정을 해야 할 때.


1년 가까운 그 시간 동안 나는 나름대로 내가 가진 에너지 안에서 많은 경험을 채워 넣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문경에서 궁여지책과 함께 한 5개월은 내가 기억하는 한, 내가 했던 가장 주체적인 행위였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것도 정말 많았다.


우선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뭐든 시도해 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공간이 없어 이동식으로, 나중엔 다른 공간의 작은 한 켠으로. 모든 것이 임시방편 같았지만, 그럼에도 이어갈 수 있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불완전한 채로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배운 시간이었다.


출근길이 설레는 경험도 처음으로 했다. 서울에서 일할 땐, 회사로 가는 지하철 출구를 지옥문처럼 느낄 때가 있었다. 일이 내게 너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일 밖에 없는 일상이 고통스러웠다. 책방으로 향하는 길은 달랐다. 작은 이동식 책방을 열러 가는 길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때 생각했다. 일이 내게 그렇게 중요하다면, “내가 기분 좋은 출근길을 만들 수 있는가”를 일을 선택하는 척도로 삼고 싶다고.


또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단서를 발견하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책을 누군가와 나누고, 그걸 매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순간은 특별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좋아해 줄 때 느껴지는 뿌듯함,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관계가 싹트는 감각이 좋았다. 나는 늘 스스로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여겨 왔는데, 취향과 관심사를 나누는 대화는 내게 에너지를 주는 일이었다. 룸메이트가 내게 "정민님 같은 사람이 오히려 커뮤니티를 만드는 일에 잘 맞는 사람일지도 몰라요. 사람을 너무 좋아하면 지칠 텐데, 정민님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테니까요."라고 말했던 순간을 계속 곱씹게 됐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언젠가는 각자의 취향과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싶다는 소망도 생겼다. 꼭 책방이 아니어도 사람들이 느슨하게 모여 교류할 수 있는 그런 공간.


무엇보다 문경에서의 생활을 통해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일 때문에 갔던 시골과 살아보는 시골은 차이가 있긴 해도, 내가 시골을 좋아했던 이유가 바뀌지는 않았다. 자연이 가깝다는 것, 낮은 인구 밀도, 없는 게 많아서 할 수 있는 게 많을 거라는 가능성. 살아보니 내겐 더 와닿는 장점이었다. 굳이 서울이나 수도권이 아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더 이상 도시에서의 그리고 싶은 삶이 없어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까.


그럼에도 뚜렷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어디에 살지도, 무슨 일을 할지도.

5개월을 지냈는데, 이곳의 환경도 좋고 만난 사람들도 좋은데 '여기에 정착해야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또 책방을 계속하겠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책방은 내 한 몸을 건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책을 팔러 가는 출근길이 기분 좋았던 건,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허락했기 때문일 것이다. 먹고사는 무게에서 잠시 벗어나 있었기에, 그때의 출근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오롯이 ‘하고 싶은 일’이었고, 그래서 마냥 좋았던 거다. 하지만 계속해서 돈을 안 벌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다고 돈을 벌기 위해 다시 원래 하던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은 더 없었다. (돌이켜보면 아마도 그 일을 그리워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새로운 시도 속에서 흔히 “내 길을 찾았다”라고 말하던데, 나는 오히려 더 막막해졌다. 약속했던 1년의 끝이 다가오는데도 여전히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디에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힘들었다. 답을 찾지 못한 채 부유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해답 없는 질문들만 늘어갔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작은 믿음은 있었다. 이 시간이 분명히 나에게 자양분이 될 것이라는 것. 대학교 때 졸업을 유예하며 보냈던 1년도 그렇고, 지금의 1년도 그렇고 겉으로 보기에 특별한 성과는 없었지만 남은 게 전혀 없진 않았다. 고통스럽고 답답했지만, 결국 그 시간을 지나면서 나는 나 자신을 조금 더 알게 되었고, 그만큼 다음을 살아갈 힘이 생겼다. 그래서 방황은 단순한 공백기가 아니라, 다음을 위해 에너지를 비축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직장인 정민이가 열심히 일한 대가로, 대학생 정민이보다 통장잔고의 여유가 있지 않은가. 이 방황의 시간을 조금 더 버텨낼 수 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선택을 미뤘다. 처음 나에게 허락했던 갭이어 1년은 끝나가고 있었지만, 나는 그 시간을 1년 더 연장하기로 했다. 방황을 멈추지 않고, 조금 더 이어가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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