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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내부고발자의 고민 -셰익스피어, <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번부터 읽기

by 박둥둥 Mar 20. 2025

 

 <햄릿>을 마지막으로 읽었던 건 학부 때 영문학 수업을 교양으로 들었을 때였다. 전공이 아니라 교양강의라서 원문은 발췌해서 읽고 전체 내용은 번역된 민음사판 <햄릿>을 읽어나가는 수업이었다.

마침 민음사판이 유명한 ‘사느냐 죽느냐’를 ‘있음이냐 없음이냐’로 번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화제가 되고 있을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번에 다시 읽었더니 그동안 다시 '존재함이냐 아니냐'로 바뀌어 있었다.)


 그 수업 과제로 민음사판을 바탕으로 실제 연극을 만든 <테러리스트 햄릿> 이란 작품을 관극 하기도 했는데, 햄릿을 기존 질서를 모두 파괴하는 테러리스트라고 해석해서 제목을 그렇게 붙였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때도 그랬지만 다시 읽어본 지금도 햄릿은 과감한 테러리스트라기보다는 망설이는 내부고발자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다. 그것도 고발을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닌 광인의 애매한 말들을 뿌려가면서 조심조심 고발과 헛소리의 사이를 줄타기하는 고발.

그도 그럴게 애초에 햄릿에게 그만큼의 결단력이 있었다면 고민 따위 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


앞서 읽었던 민음사 1번 <변신이야기>와 <햄릿>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더 확실하게 두드러진다. <변신이야기> 속 주인공은 신이다. 인간은 애초에 어떤 선택지도 없이 신이 정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자연히 ‘있음이냐 없음이냐’는 고민조차 할 권리가 없다.

그러나 <햄릿>에 이르러 드디어 주인공 햄릿은 자신의 선택을 두고 고민을 하게 되고 그에 따른 자신의 미래도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

물론 그가 처한 갈등상황은 아버지에 대한 의리냐 어머니와 자신의 현 상황에 대한 타협이냐라는 것으로 완전히 그 개인만의 고민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선택하고 고민하는 인간이 문학에 나오기까지는 셰익스피어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햄릿>이 가진 또 다른 큰 특징은 사회가 타락하고 어두울수록 이 작품이 가진 시사성이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햄릿이 가진 고민은 이 한마디로 압축되기 때문이다.

‘나만 조용히 하면 모두가 행복하다’는 것.


분명 작중의 상황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어머니가 삼촌과 결혼했다는 상식과 원칙을 벗어나 있는 사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덴마크는 그런대로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게 문제다.

왕이 된 삼촌이 딱히 폭정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복수를 준비한다는 포틴브라스 왕자의 침입을 경계하며, 어머니는 어머니 대로 새 남편과 행복하고 햄릿 자신의 왕위계승도 삼촌이 보증해 준 상태이다. 아름다운 오필리어도 햄릿의 아내가 되기에 아무 문제가 없는 상황.


이 상황에서 선왕의 의문스러운 죽음을 철저히 밝히고, 근친상간에 해당하는 형수와의 결혼을 무효로 돌려야 한다는, 햄릿이 주장하고자 하는 폭탄발언은 실제적으로 별문제 없이 그럭저럭 돌아가는 이 시스템을 통째로 뒤엎을 무게를 가진 발언이 된다. 따라서 여기서 햄릿이 계속 문제 삼고 고발하며 원점으로 돌리고자 한다면, 약간의 정의는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확실하게 그 자신은 물론이고 오필리어같이 무고한 희생자를 만드는 모두가 자명하게 불행해지는 길이라는 것이 작품에서는 자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걸어가며 타인의 행복을 희생시켜서까지 정의는 추구되어야 하는 것인가. 나 하나만 조용히 있으면 나를 포함해 모두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잘 살아갈 터인데 이건 모두 잘못된 거라 말하는 건 누구를 위한 것이 되는가.


이 현대 사회에도 쉽지 않은 내부고발자의 고민이 곧 햄릿의 고민이자 또한 너라면 어떻게 할지를 독자에게 물어보는 작품의 고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원칙이 망가진 사회에서 극장에 모여 햄릿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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