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셰익스피어, 『햄릿』
『햄릿』을 마지막으로 읽었던 건 학부 시절, 교양으로 들었던 영문학 수업 시간이었다. 전공 강의가 아니라 발췌된 원문과 함께 민음사판 『햄릿』을 읽어가는 수업이었는데, 마침 그때가 ‘사느냐, 죽느냐’를 ‘있음이냐, 없음이냐’로 새롭게 번역한 판본이 화제가 되던 시기였다. 수업 과제로는 이 판본을 토대로 만든 연극 <테러리스트 햄릿>을 관극하기도 했다. 제목처럼 햄릿을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테러리스트로 해석한 연출이었지만, 그때도 지금도 내게 햄릿은 과격한 파괴자가 아니라 오히려 망설이는 내부고발자에 더 가깝게 다가온다. 그것도 고발을 단행하는 것도, 끝내 침묵하는 것도 아닌 채, 광인의 애매한 언어를 흩뿌리며 고발과 헛소리의 경계 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존재 말이다.
사실, 햄릿에게 단호한 결단력이 있었다면 애초에 그렇게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앞서 읽었던 민음사 세계문학 1번,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와 비교해보면 이 차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변신이야기』 속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인간은 신이 부여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로, 선택할 권리조차 없다. 그러나 『햄릿』에 이르러 비로소 인간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등장한다. 물론 햄릿의 고민이 전적으로 개인적 문제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의 갈등은 아버지에 대한 의리와 어머니, 그리고 새로운 권력 체제 사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민하고 선택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문학 속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셰익스피어를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햄릿』이 가진 또 다른 특징은, 사회가 어두워질수록 오히려 그 시사성이 빛을 발한다는 점이다. 햄릿의 고민은 결국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나만 조용히 하면 모두가 행복하다.”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삼촌과 결혼한다는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졌지만, 정작 덴마크라는 국가는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왕이 된 삼촌은 폭정을 일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외세의 침략을 경계하며 나라를 지킨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안정된 삶을 이어가고, 햄릿의 왕위 계승권마저 보장되어 있다. 원칙적으로는 분명 잘못된 질서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모두가 별 탈 없이 살아가는 중이다.
그런데도 햄릿은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다. 침묵을 깨고 고발하는 순간, 그는 오필리어와 같은 무고한 희생자를 낳으며 모든 것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는, 타인의 행복과 자신의 안위를 무너뜨리면서까지 끝내 추구되어야 하는가? 내가 입을 다물면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데, 굳이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외치는 것은 누구를 위한 일일까?
햄릿의 이 고민은, 내부고발자의 고민과 겹쳐진다. “침묵을 택할 것인가, 진실을 말할 것인가.” 이 질문은 400년 전 덴마크 궁정의 비극을 넘어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리고 작품은 조용히 묻는다. 만약 당신이 햄릿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