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년,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향하면서 토라야는 중대한 갈림길에 선다.
“천황을 따라 도쿄로 옮길 것인가, 아니면 교토에 남아 전통을 지킬 것인가.”
이미 한 차례 에도점 실패를 겪었던 토라야에게 이번 선택은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12대 당주 쿠로카와 미츠마사는 먼저 선발대를 보내기로 한다. 자신의 서형(庶兄)인 미츠야스를 도쿄로 보내 기반을 다지게 한 것이다.
미츠야스의 전략은 단순했다. “교토의 황실 과자점”이라는 자부심을 내세우는 대신, **“에도에서는 신참”**이라는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시작하는 것. 교토에서 쌓은 역사와 권위를 등에 업는 대신, 도쿄 사람들에게 새로이 인정받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 전략은 통했고, 토라야는 점차 도쿄에서도 확실한 입지를 굳혀 나갔다. 7년 동안 이 작업에 헌신한 미츠야스가 세상을 떠나자, 결국 미츠마사 본인이 도쿄로 올라오게 된다. 그는 긴자를 거쳐 아카사카에 매장을 열고, 앞으로는 이곳이 토라야의 본점임을 당당히 선언했다.
그리고 바통은 곧 젊은 세대로 넘어간다. 20세의 나이에 당주가 된 13대 미츠마사는 아버지의 이름을 이어받은 만큼 그 기개도 닮아 있었다. 젊은 당주는 패기롭게 새로운 시도를 이어갔다. 외국인들도 점차 늘어나는 시대라 판단해 영어로 광고를 제작하고, 신분제가 완화된 메이지 사회에서 이제는 **“돈만 있으면 누구나 토라야의 고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신문 광고를 적극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전날까지 예약하면 할인 판매를 하고, 대량 주문은 직접 배달까지 해주는 맞춤 서비스도 시도했다.
뒤이어 14대 당주 미쓰카게는 아버지의 개혁 정신을 이어받았다. 그는 시대의 유행을 읽는 데 밝았다. 갓 일본에 들어와 인기를 끌던 골프에 착안해 **골프공 모양의 모나카 ‘홀인원’**을 출시했고, 여름 선물로 인기를 모은 **녹차맛 양갱 ‘신로쿠’**도 이 시기에 태어났다. 전통을 지키면서도 시대에 맞는 변화를 시도하는 토라야의 도전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