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상수첩 열여섯 번째 기록, ‘플로리다반점’
등잔 밑이 어두울 땐 빛을 비추자.
역사와 전통이 담보하는 맛에 대한 확신은 그 맛을 선택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다. 당연하겠지만, 그것엔 맛에 대한 기존의 경험과 경험에 대한 내 신뢰, 판단이 담겨 있으니까. 여러 심리 검사들에선 도전을 좋아하는 성격과 변화를 싫어하는 성격 두 가지를 평가지표의 양 극단으로 자주 배치하지만, 음식에는 정확하게 통용되는 방식이 아닌 듯하다. 생존 본능과 궤를 같이하는 기본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다른 부가적인 요소들, 이를 테면 게임 같은 기호를 충족하는 것에 비하면 더 원초적이라 그런 게 아닐까. 아닐 수도 있겠지만. 메롱.
해서 나는 내 생존 욕구에 확실한 답이 없는 문제가 개입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 아니다. 모험과 도전은 어쩌면 꽉 채운 삶의 아주 작은 빈틈, 그 여분의 공간을 채우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가끔은, 굉장히 견고하면서도 절대 그럴 리 없다 생각한 기준선 안에 -나에게 있어선 생존 욕구- 불확실성이 아주 살짝 걸치게 되는 경우들이 발생한다. 사실 정답이 굉장히 헷갈리는 경우가 그럴 테고, 아님 또 뭐에 홀렸던지.
근데, 정말 가끔은 소 뒷걸음질 치다 얻어걸린 것처럼, 그냥 찍었는데 채점해보니 정답인 문제도 있기는 하니까. 에라이, 될 대로 되라고 되라고 해버렸는데 정말 되어버렸을 경우엔, 나도 너도 우리 모두 당황스럽지만 그래도 기분만큼은 최고지.
플로리다엔 분명 없을 법한 반점이고, 그렇다고 서울엔 있을 법한고 하면 그도 아니고, 근데 왜 서울 한복판에 있지? 중화요리 간판 작명 필패 공식이 있다면 이런 걸 예시로 들어놨을 것만 같은 이름인데, 맛은 필승인 걸 보면 철학과 졸업했는데 왜 철학관 안 하냐는 주변 사람들 질문에 나도 모르게 정답을 주는 것 같은 느낌이네 이거.
아이고, 등잔 밑이 어두웠네. 하여튼 지근거리에 있는 복도 못 챙기면서 어디 남의 것을 탐하겠다고, 그러다 보니 아직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인가 보오. 인연은 가까이에 있다더니만, 모르겠으면 일단 불이라도 좀 비춰볼 걸 그랬네. 내 눈 내가 가린 거 아니면, 어두워서 안 보일 땐 그게 최선이지.
아직은 내가 쓴 답이 정답인지 아닌지 모르니까, 방심하지 않은 채 경건히 주전자와 두 반찬 그릇을 응시한다.
첫 경험은 언제나 설레지만 그래서 늘 두려움을 동반하는데, 손을 떠난 다트핀이 언제나 원하는 지점에 도달하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그 지점이란 게 만족과 실망 두 갈래밖에 없다면 기다리는 것 말곤 다른 방도가 없다. 근데 기다림은 초조함을, 초조함은 두려움을 낳는 감정의 연결고리를 고려해보면, 감정의 추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조금이라도 기우는 순간, 무자비하게 그 방향으로만 침전하는 상황이 도래하게 된다.
그렇지만 반대로 말하면 설렘은 전세 역전의 용사처럼, 틀린 문제일지라도 뭐 다음에 또 안 틀리면 되니까, 더 행복할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를 읊조리며 행복 전도사가 된다. 기다림이 설렘으로, 그리고 설렘은 행복으로. 와우. 저울 신은 이렇게나 줏대가 없다.
탕수육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고기 튀김이 아니라 튀김 튀김을 먹는 것 같은, 살아생전 경험해보지 못한 놀라운 식감을 마주하게 된다. 고기를 둘러싼 수백의 튀김을 하나로 뭉쳐 다시 튀겨낸 것처럼, 낱알갱이들로 와사삭 분해되는 느낌. 그래. 쿠크다스다. 싫어하는 친구 있으면 그 친구 침대 위에서 쿠크다스 먹으면 된다고도 했는데. 아마 쿠크다스로 고기를 감싸 튀기면 이런 느낌일 거다. 쿠크다스 튀김 탕수육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싶지만, 철학과 나와 철학관 차리지 않은 게 다행이란 소리를 들은 것 같으니 그러지 않겠다.
소스는 또 얼마나 애간장 태울 정도로 절묘하게 묻어 있는지, 이게 맛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아슬아슬한 양이 제공되다 보니까 공급과 수요의 원칙이랄까, 없으면 왠지 끌리고 못 가져 초조해지는 심리가 이 탕수육에 작용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플로리다 반점, 이름에서 일부러 기대를 한껏 낮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사장 선생님이 심리학을 전공했을 거란 합리적 추론이 가능한 부분이다. 애간장 태운 맛이지만 쿠크다스 튀김 탕수육에 맛을 더했으면 더했지 분명 덜 하지는 않은 좋은 맛이다. 그리고 왠지 쿠크다스 가루가 좀 덜 떨어지게 막아주는 피부 보호막, 피지 같은 작용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쿠크다스 튀김 애간장 탕수육이라는 이름을 마지막으로 시도해보고 장렬히 전사한다.
은혜로운 동물 닭은 미처 태어나기도 전에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죽어 흔적을 남긴다.
태어날 순간만 고대하던 알새끼들은, 그들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세상 빛 보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빛바랜 태양처럼 하얗게, 하얗게 남아버렸다. 후라이가 되었다.
계란 후라이는 토스트와 함께 먹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다. 다시 광명 찾으려면, 짜장면 말고 토스트에 넣어주자.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 지을 수 있을까. 나는 못한다. 누군가는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못한다고 얘기 못한다. 내가 못한다고 남들이 다 못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첨벙 대는 바닷물에 과연 누가 함부로 기준을 세울 수 있을까. 구분 없는 바다는 그냥 바다, 육지는 육지. 나한테도, 그리고 세상에도 그게 전부일 거다.
깊은 육향 훑고 나면 ‘오우 이건 정말이지 육지 동물을 제물로 바친 훌륭한 맛이군’ 했다가 건져 올려진 해산물들 보고 ‘오우 이건 놀랍게도 바다생물로 가득한 용궁의 맛이네’ 했다가,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 갔다 했다가. 훌륭한 맛 표현할 길 없으니 한탄스럽기 짝이 없지만, 나 좋을 대로 얘기하자면 굳이 살을 보태지 않아도 될, 맛 좋은 맛 짬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