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 잔치를 벌인 날의 기억
선배 중에 과일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가 있다. 어느 정도로 싫어하냐면 1년에 사과 세 개를 먹을까 말까 할 정도다. 사과뿐만 아니라 배, 복숭아, 포도 등 대부분의 과일을 싫어한다. 그러면 비타민이 부족해 면역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염려들도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다. 같은 또래들과 비교해도 건강남이 확실하며 의학적 검진을 받아봐도 비타민 부족 현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과일 값이 역대급으로 치솟아 나라 전체가 몸살을 겪는 때, 그 선배에게 “과일 안 먹어 좋겠다”는 농담을 했다가, 한 대 맞을 뻔했다. 선배가 농담을 다큐로 받으며 말했다.
“과일이 과일에만 머무냐? 사과 한쪽 값이 경제 전체를 움직이는 거 알아 몰라?”
10여 년 전 튀르키예의 해변도시에 갔다가 전통시장의 과일가게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노랑 빨강 파랑 주황 초록의 열대과일들이 저마다 탑 모양으로 쌓여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꼭지점에는 한 알이, 아랫단에는 세 알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널찍하게 자리를 잡고 색깔별 모양별로 차곡차곡 쌓인 모습이 피사의 탑을 연상케 했다. 한 집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옆의 옆의 옆의 과일가게마다 개성을 부리고 있었다. 맛있기보다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과일 탑들을 보며 “모양이 흐트러질까봐 차마 못 사겠다”고 했더니, 주인이 말했다.
“오 마이 브라덜, 쓸데없는 걱정 마세요. 이 모양은 절대 안 흐트러져요.”
(튀르키예인들은 한국인을 오 마이 브라더라고 부른다. 감탄사 oh를 꼭 넣으며 형제를 만나 반갑다고 감격해 한다. 가식이나 상술이 아님을 느꼈다).
매일 아침 과일로 탑을 쌓는 시간도 시간이고, 탄력이 약한 과일은 더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것까지, 두루 걱정을 해대니 또 말했다. 오 마이 브라덜, 쓸데없는 걱정…
가격은 천국이었다. 동행자 몇이 조금씩 사 맛이나 보려 했지만 ‘오 마이 브라덜’은 덥석덥석 덤을 얹어 주었다. 그날 밤 우리들은 열대과일 잔치를 벌였다. 잔치를 벌이며 그 가게들의 히스토리를 들었다.
과일 탑의 원조는 한 가게의 너댓 살짜리 꼬마였다. 엄마를 따라 나와 심심풀이 삼아 과일로 탑을 쌓으며 놀았다. ‘팔아야 하는 상품에 손대지 말라’고 말린 이는 아빠, ‘아이참 예뻐라’ 하고 다른 과일들도 해보라고 권한 이는 엄마였다. 사람 손을 탄 과일이라 안 팔리면 어쩌나… 걱정은 기우였다. 신기하다며 찾아온 관광객들이 그 가게로만 몰렸고, 며칠 뒤부터 과일 탑은 옆집과 옆집으로 전이되어 갔다. 그곳의 과일가게들은 아침마다 더 예쁜 과일 탑 만들기 경쟁을 하며 문을 연다고 했다.
그날 밤 우리가 맛본 것은 과일 맛이 아니라 사람 맛이었음을 훗날 깨달았는데, 왜냐하면 기억에 남는 것이 과일 탑의 모양과 브라덜을 외치는 털보 아저씨와 꼬마였기 때문이다. 과일 맛이 얼마나 달콤했는지, 신선했는지, 당도가 높았는지 낮았는지는 희미하지만, 그 모양과 이야기와 사람들의 인상은 강렬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과일 값을 그리 싸게 받으면서, 지나치는 관광객에게 덤은 왜그리 많이 주는지, 쓸데없는 걱정을 10년도 지나 하고 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과일 값’ 때문이다.
지난 주말 아내가 말했다.
“사과 좀 사려 했다가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쳤어요. 이게 무슨 일이래?”
우리나라 사과 값이 세계 1위라니, 정말 1위도 가지가지 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