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색깔
작은 모임이 있었다. 제각각 연배와 직업이 다른, 세 명의 여자와 조촐한 저녁식사를 했다. 그중 한 여자는 보석 디자이너였다. 살면서 처음 만난 직업군이다. 보석 세공사도 만나 봤고, 보석 판매자도 만나 봤고, 이런저런 분야의 디자이너, 아티스트들을 제법 접해 봤지만 보석 디자이너를 만나다니… 운수 대박이다.
다시없는 기회였기 때문에 평생에 인연 없었던 보석의 세계에 대한 무한질문을 퍼부었다(그녀는 얼마나 피곤했을까). 그리고 보석에 대해 갖고 있었던 선입견을 상당 부분 떨쳐내고 새로운 지식들을 얻었다. 여성뿐이 아니라 남성적 세계에서 더욱 중시돼 왔다는 역사성, 시각과 촉각 중심의 아름다움에서 나오는 에너지, 무엇보다 귀가 쫑긋했던 정보는 ‘도둑질의 최적 물품이 보석’이라는 얘기였다.
듣고 보니 일리 만빵이었다. 보석은 대개 작다. 작으면서 비싸다. 추적도 어렵다. 다른 고가 물품들과 달리 형태를 바꿀 수가 있고 이동도 간편하다. 그런 까닭에 서구에서는 보석 판매점의 보안에 엄청난 공을 들인다고 한다. 한국처럼 단순하고 허술한 구조 속에서 보석을 취급하는 것, 아찔한 일이라고 보석 디자이너가 말했다.
어제 내린 올해 첫눈은 화끈했다. 자고 일어난 아침, 온통 하얗게 뒤덮힌 창밖 세상은 보석이 뒤덮인 것 같았다. 와우, 감탄이 나왔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조심조심 종종걸음으로 출근하며 이상도 하지, 생각했다.
고작 눈이 흠뻑 내린 것뿐인데 왜 기분이 들뜨는 거지?
풍경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풍경이 영감을 일으키는 일이 다반사이긴 하지만, 어쨌든 신기하다. 눈이 빨갛거나 파랗거나 노랗지 않고 하얀 것도 신기하다. 이 모든 것이 기적 같다. 아찔한 일이다.
흩날리던 눈발은 시간이 지나면서 양이 늘어났다. 함박눈이 폭설로 변해 갔다. 오랜만에 만난 첫눈의 진풍경.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풍경이 점점 본색을 드러냈다. 마음에는 불안과 두려움을, 몸에는 한기와 스산함을 배달했다.
이런 날에는 당연히 달도 별도 없다. 퇴근길의 정체와 소란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한히 쏟아지는 눈들을 향해 말했다. 젠장, 영감은 무슨.
올해의 마지막 달이 왔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한 해를 헤아려보니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기적 같다.
진눈깨비가 떠오른다. 눈도 아니고 비도 아니고 물도 아니고 얼음도 아닌, 눈이기도 비이기도 물이기도 얼음이기도 한, 이름도 오묘하게 진눈깨비인(이렇게 아찔한 이름은 도대체 누가 붙였을까) 그것이 대체로 첫눈이 된다. 첫눈으로 인정할지 말지 헷갈리게 만들며 겨울맞이를 해온 해가 훨씬 많았다.
색다른 12월을 시작하며 눈과 보석 이야기를 하게 됐다. 12월의 색깔을 규정한다면 희고 찬란한 색이어야 할 것 같다. 하얗거나, 새카맣거나. 그런데, 희고 검고 텅빈 것의 어원은 같다고 한다. 영어로는 다음과 같다.
하양 ; Blanc
검음 ; Black
텅빔 : Bla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