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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에 대하여

작은 깃발, 이상한 깃발, 신기한 깃발

by 포포

나라를구하는끼순이연합, 똥강아지산책연합, 다차원-원거리딜러협회, 지옥에서온 워커연합, 한국레즈비언상담소, 고양이감자채굴단, 전국역사교사모임, 이스트빌리지 자유음메연대, 전국건강우량불량청소년연합, 전국고우앵이 그래프 애호단, 성소수자 부모모임, 영웅수집가, 청년성소수자문화연대, 사회주의정당건설연대, 나라를 바로 세우려 고개를든 문예창작학과연맹, 국경없는이방인연대, 눈감고 책읽기 연구회...


지난 토요일(12월 14일) 여의도 집회에 등장한 깃발들 중 내 눈을 끈 것들 일부를 옮겼다. 내 시야에서 반경 50미터 내외이니 (드론이나, 하늘을 나는 슈퍼맨이 되어) 전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면 더 '신기한' 단체명을 엄청나게 봤을 텐데, 아쉬움이 크다.


나는 60대다. 어디에서는 노인 대열에 끼고(주요 노인회 가입연령이 60이다), 어디에서는 청년(농촌에서는 청년회원 자격이 있다) 대접을 받는 세대다. 고교시절 박정희 사망 뉴스를 보고 나라가 망하는 것 아닌가 걱정을했었고, 5.18과 비상계엄, 국보위 설치 같은 군인들의 행진을 보며 불길한 느낌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민주화투쟁기에는 방관적 자세로 도만 닦고 살았다. 최루탄에 대항해 소줏병 폭탄을 제조하던 학생들을 비웃기도 했다. 1987년 선거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이 분열하는 것을 보고는 "국민수준=정치수준"이라고 자조하며 전봇대 밑에 침을 뱉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하는 사이 나도 변해 갔다. 왠지 모르게 빚진 기분을 느꼈고, 너무 안전지대만 밟고 사는 건 아닌지 자책도 하는 사이 60대가 되었다.


대통령 탄핵 요구 첫 토요집회(12월 7일)는 그냥 나갔다. 갈 때는 순조로웠는데 돌아올 때는힘들었다. 어디로가서 어떤 차를 타야 할지 몰라 사람들 가는 대로 밀려 걸었다. 다음주 금요일 저녁 집회 때도 얼떨결에 나가 이승환 공연을 끝까지 보느라 발끝이 얼어붙는 줄 알았다. 서둘러 귀가해 코를 골며 잤다.


토욜에는 단디 차려 입고 나갔다. 이번에는 (국회의사당역이 아닌) 여의도역에서 내렸다. 사람이 너무 많을 것을 염려하기도 했지만, (역사적 현장으로 기록될 게 분명했으므로) 조금 더 멀리부터 전체적으로 보고 싶기도 했다.


편의점에서 따뜻한 쌍화탕 한병을 사먹고 작은 핫팩 두 개를 사 운동화 밑에 깔았다. 초컬릿과 에너지바를 사서 배낭에 넣으며 혼자 웃었다. 비상계엄 출동하는 무사가 된 기분이었다. 자, 이제 출발을 혼자 선언하며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30분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깃발에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일반 대중들의 집회에 정당이나 노조, 조직적 깃발들이 너무 나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깃발들은 종종 전면 시야를 가로막기도 했다.


여의도역에서 50미터나 갔을까, 인파에 길이 막혀 앞사람의 등짝을 보고 서있어야 했다. 뒤에서 핫팩이 건네져 왔다. "핫팩 있는데요?" 했더니, "그래도 받으세요. 혹시 모르니." 어디에서 누가 준 건지도 모른 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기분이 다소 묘했다.


저 멀리까지 언제나 갈까, 고개를 쳐들고 위를 보니 재미있는 깃발이 보였다.

무리짓는 초식동물연합(연대인지 연합인지, 바람이 깃발을 휘감아 확인하기 어려웠는데 나중에 확인했다).

쓰윽, 미소가 지어졌다. 초식동물연합의 일원으로 여의대로를 건너기까지 족히 30분은 걸렸나 보다. 그리고 여의도공원 끝(의사당 방향)에 다다르니 더이상 진입이 불가능했다.


반대편으로 이동하는 무리도 있었는데 한줄로 힘겹게 헤쳐 나가며 "더 이상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자리 없어요" 하는 소리를 계주 바통처럼 이어 외쳤다. 결국 줄맞춰 앉아있는 대열 근처에 서게 됐는데, 그 자리는 탄핵 결과가 나올 때까지 내 차지가 됐다.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돌아설 수도 없는, 내게 미리 배정돼 있던 자리인가 싶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눈감고 책읽기 연구회' 깃발이 나부꼈다. 앞으로 눈감고 책읽기를 해봐야지, 생각하면서 연구원 자격을 쟁취했다.


그 깃발은 비교적 작았고, 흰 바탕에 쓰여진 검정글씨도 착하고 점잖아 보였다. 글자 위 깃발 한복판에 둘리 비슷한 생명체가 누워서 책을 읽는 일러스터가 그려져 있었다. 둘리의 눈이 감겨 있는 건지 뜨여 있는 건지 헷갈렸지만 연구회원이라면 감은 것이려니 받아들였다. 한글 아래에는 영문명도 있었다.

Closed-Eyes Reading Club


산에서 더덕을 캐본 사람은 안다. 더덕 하나를 발견하면 주변 여기저기 숨은 더덕들을 줄줄이 찾게 된다. 시각과 후각이 합일해 나머지 다른 감각들을 살려내는 순간, 쾌감이 엄청나다. 하나의 깃발을 발견한 이후 갑자기 내눈이 활력을 찾았다. 사방에서 펄럭이는 깃발들이 보였다. 귀엽고 깜찍하고 위트있는 깃발들이 거창하고 조직적인 단체깃발들을 압도했다.


자리에 줄 맞춰 앉아 있는 사람들의 태반은 젊은 층이었다.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젊고 예뻤다. 유쾌하고 또랑또랑한 눈빛들이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나오는 진행자의 목소리에 일사불란한 응답을 했다. 국회를 향해 함성 5초... 외칠 때는 청년들의 폐활량이 전이돼 오는 듯, 내 목에도 힘이 솟았다.


젊은 여성들은 어떤 노래든 다 따라불렀다. 오랫동안 훈련을 해왔던 것처럼 척척 합창을 즉석에서 해냈다. 1980년대의 한국인과 2020년대의 한국인은 많이 달랐다. 과거의 내 모습을 돌아보며 울컥해졌다. 어린시절엔 쭈뼛쭈뼛 눈치를 많이 봤고, 청년기에는 토하고 부르짖느라 뇌가 경직돼 있었다. 빨갛고 시커멓고 시퍼런 깃발들로 결의를 강요당한 적도 없지 않았다. 지금의 청년들은 주눅들지 않는다. 리듬에 몸을 맡기고 기꺼이 즐길 줄 알고, 아닌 건 아니라고 외칠 줄을 안다. 부럽고 다행이다.


마침내 탄핵안 가결이 대형 스크린을 통해 전달돼 왔다. 함성이 터졌고 사람들은 일어섰다. 깡충깡충 뛰며 하얗게 웃는 이들속에서 눈물을 닦는 청년들이 몇 보였다. 귀여운 깃발들이 힘차게 펄럭였다. 감격적인 현장을 영상으로 찍으며 이마저도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광장 한복판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끼어 한참을 서있는데, 바로 옆의 두 아주머니가 든 깃발이 보였다. 두 개의 깃발은 이란성 쌍둥이 같았다.


깃발1> 도깨비도 뿔났다! (+도깨비 얼굴 그림)

깃발2> 산군님도 노하셨다! (+호랑이 자태 그림)

-한국 인외러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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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를 든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인외러가 무슨 뜻이에요?"

"인간 외의 모든 생명체들이랄까, 뭐 그런 뜻이에요. 킥킥킥."

아하, 도깨비와 호랑이가 말하자면 '인간 외의 러'란 의미였다. 사진을 찍으려 하니 깃발을 나란히 펼쳐 도깨비와 산군님이 잘 보이도록 해주었다(나중에 알아봤더니 40대 전후 세대 성장기에 인외러 웹툰이 한창 유행했었다고 한다).


어둠이 깊어지고 기온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여의도 공원에서 광장으로, 여의대로를 다시 건너기까지 또만만치 않았다. 전철역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여의도역 입구부터 줄 서있는 인파의 끝쪽으로 걸어가며 길이를 어림잡아 봤더니 500미터는 되겠다 싶었다(길이를 재보며 별짓을 다하네 하고 생각했다). 저들은 언제 전철을 타려고 저렇게 기다릴까, 인내심에 경외감이 들었다.


KBS별관 쪽으로 계속 걸어 샛강역으로 이동했다. 나름 머리를 쓴 것이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꾸역꾸역 사람들은 계속 밀려들었다. 이제 아무 버스나 타고 일단 여의도를 벗어날 길을 찾고 싶었다. 계속 걷고 있는데 십여명쯤 줄 서있는 무리가 보였다. 마녀김밥집 앞, 지나치려다 가게 문에 붙은 안내문을 봤다.


'저희 매장의 고객께서 마녀김밥 500줄을 토요일 오후 1시부터 여의도집회 참여자에게 나누어달라고 200만원을 선결제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부탁으로 1인당 1줄씩 (김밥이) 소진될 때까지 나눌 예정입니다. 집회 참가자분들께서는 꼭 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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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를 읽고 있자니 학창시절의 대자보가 떠올랐고, 이내 출출하고 한기가 느껴졌다. 글자들의 힘은 대단하다. 500줄이면 금세 바닥 났을 텐데 아직까지 남아있는 게 이상했다. 앞에 서있던 여성 둘도 그런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 한 여성이 "500줄만 했겠어? 분명히 더 만들지 않았을까?"라고 긍정적 해석을 내놓았다. 뭔가 그럴 듯하고 그러길 바라며 기웃거렸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늘, 어김이 없다. 잠시 후 마녀김밥 사장님이 밖으로 나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제 끝났습니다. 재료가 완전 동났어요." 그가 미안할 일이 전혀 아닌데도 표정에 송구함이 역력했다. .

다행히도 내앞의 여성들과 그 앞의 몇몇까지 따라지 동지들이 있어 위로가 되었다. 나 홀로 또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면서도 계속 걸었고, 어쨌든 집에는 돌아왔고 깊게 잤다. 꿈에 무슨 깃발인지를 열심히 만들었는데 뭔가 뜻대로 되지 않아 꿍얼대다가 깨어났다. 다음에는? 여전히 계획이 없다. 그냥 불쑥, 나가야지 생각할 때가 오지 않을까 싶긴 한데, 아마도 나의 깃발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이참에 깃발 하나 만들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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